―고이즈미 구조개혁을 돌아보면….
나는 아주 근본적인 곳, 즉 ‘밸런스시트’(대차대조표)에 문제가 있다고 봤다. 은행은 외형이 컸지만 불량채권도 많았다. 기업과 가계도 사정은 비슷했다. 재정 건전화 없이는 어떤 정책도 효과가 없었다. 여기에 손대자고 고이즈미 전 총리에게 제안했고 그도 찬성했다. 이에 따라 고이즈미 개혁이 시작됐다. 방향은 작은 정부로 가는 길이었다.”
―고이즈미 정권 전반기의 금융 개혁, 후반기의 우정민영화 개혁에 저항이 만만치 않았는데….
경제 자체의 문제뿐 아니라 이에 수반되는 정치적 문제와도 싸워야 했다. 불량채권을 해소하려면 고통받는 기업이 나오는데, 이런 곳일수록 큰 ‘정치력’이 있었다. 정부 공공사업에는 정치적 역학관계가 생겨나기 마련이어서 건설업자와 자민당 족(族)의원(건설업계의 이익을 대변하는 유착의원), 관료의 정치적 트라이앵글이 갖춰져 있었다. 고이즈미 전 총리는 강한 의지를 갖고 이들과 싸웠으며 나는 힘이 닿는 한 그를 보좌했다.”
그는 고이즈미 전 총리가 자민당 총재 선거에 출마하기 직전에 고이즈미 정권이 실현될 경우를 대비해 정책 구상을 다루는 ‘공부회’를 만들었다. 5, 6회 모여 집중적으로 정책을 논의했는데 고이즈미 전 총리는 총재선거전으로 바쁜 가운데서도 적극 참여했다. 그는 ‘준비된 총리’였던 셈이다.
―고이즈미 전 총리는 다케나카 교수가 있어 운이 좋았던 건가.
“그는 경제의 기본 메커니즘을 이해했다. 지도자가 제대로 방향을 잡지 않으면 실무 행정에서 아무리 잘하려고 해도 어렵다. 공부회에서 그는 메모를 하지 않았다. 큰 줄기만 확실하게 머리에 넣고 돌아가곤 했다. 총리가 된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이것이 진정한 리더의 모습이라고 본다. 큰 줄기는 챙기지만 상세한 부분은 실무자에게 전적으로 위임한다. 어떤 상황에서도 나를 믿고 전적으로 밀어 줬다.”
―각종 저항을 극복한 비결은….
“정책은 머리싸움이다. ‘이런 안을 내면 관료들은 이렇게 반대해 올 거다. 그때 우리가 내세울 전략은…’ 하는 식으로 작전을 짜야 한다. 운 좋게도 내 주변에는 도움을 주는 사람이 모여들었다. 현실을 잘 모르는 학자보다 실물에 밝은 재정실무자나 업계의 도움이 컸다. 그 덕에 관료들을 물리칠 수 있었다.”
―고이즈미 구조개혁이 부익부 빈익빈의 ‘격차(隔差)사회’를 불러왔다는 비판도 있다.
“말이 안 된다. 일본에서 빈부 격차가 얼마나 생겼는지에 대한 통계가 없어 아무도 모른다. 이용할 수 있는 데이터는 2001년까지인데 이를 보면 일본은 1990년대부터 서서히 격차가 확대됐다. 이 시기에는 전 세계에 글로벌화와 함께 기술혁신이 확대되면서 앞서 가는 사람과 뒤처진 사람의 격차가 커졌다. 고소득자가 많아지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닌가. 그게 문제라면 사회주의로 가야 한다. 다만 빈곤층 문제는 일본의 정책 과제가 될 것이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정권은 고이즈미 개혁의 계승을 내세우지만 실상은 후퇴한다는 지적도 있다.
“일본어로 ‘호코로비’(스웨터의 솔기가 터진 부분)가 좀 생겼다. 아베 총리가 개혁 노선에서 이탈한 것은 아니라고 본다. 이번 예산안을 봐도 재정 축소를 비롯해 개혁 정신을 지키려고 애쓴 흔적이 보인다. 다만 작은 곳에서 솔기가 터지는 현상이 눈에 띈다. 이는 총리의 책임이 아니다. 개혁의 지속을 위해 주변 보좌진이 지혜를 내놓아야 하는데 충분치 않아 보인다.”
―아베 정권이 올여름 참의원 선거에서 위험한 것 아니냐는 말이 나온다.
그는 이 대목에서 “국민이 제대로 된 리더를 못 뽑았다면 그 책임은 결국 국민에게 돌아간다. 이것이야말로 민주주의의 엄혹함 아닌가”라고 강조했다.
―한때 ‘포스트 고이즈미’ 후보로 거론되곤 했는데….
“‘다케나카 때리기’의 일환이었다. 마지막 개혁 작업에 박차를 가하는데 관료들은 ‘다케나카는 야심 때문에 저런다’고 선동하고 다녔다. 나는 고이즈미 전 총리만을 위해 일했고 그가 그만두면 함께 그만둘 생각이었다.”
―요즘 ‘고이즈미 대망론’이 나온다. 혹 그가 총리로 돌아온다면….
“고이즈미 전 총리는 절대 돌아가지 않는다. 물론 나도 마찬가지다.”
―한국 경제도 여러 어려움을 겪는데….
한국 경제는 일본과 비슷한 고민을 안고 있다. 일본에 비견되는 ‘한강의 기적’을 이뤘다. 일부 재벌에 집중 투하하는 방식이었다. 어느 단계까지는 이것이 먹히지만, 경제가 성숙하고 사람들의 가치관이 다양해지면 그에 걸맞은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한국은 국제통화기금(IMF)의 충격 요법 때문인지 시장 메커니즘에 알레르기를 느끼는 사람들도 있는 듯하다.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시장 메커니즘에 따른 분권이 필요하다. 앞으로 한국과 일본은 미국과 중국이라는 두 강자 사이에 끼어 협력할 일이 많을 것이다.”
―향후 계획은….
“게이오대에서 4월에 강의를 시작한다. 지난 5년 반의 경험을 학문 세계에서 정리할 생각이다. ‘폴리시 워처(policy watcher·정책감시인)’를 키워야 할 필요를 느낀다. 미국은 민간인이 정부에 참여했다가 다시 학교로 돌아가는 일이 흔하지만 일본에선 별로 없다.
정치인이나 관료는 생각보다 막강한 권한을 가졌다. 민간에서 이들을 엄격하게 체크해야 하는데 일본 민간에는 그런 판단력이 없다. 한국이나 중국도 실정은 비슷하다고 본다. 가능하다면 한국 중국의 민간 정책전문가와도 힘을 합치고 싶다.”
도쿄=서영아 특파원 sy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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