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처럼 '에너지를 펑펑 쓰는 나라'라는 꼬리표가 붙어 있는 미국의 에너지 소비문화에서 작지만 의미 있는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7년째 이어지는 고유가 앞에 정부의 규제노력과 시장기능의 작동, 소비자의 민감한 반응이 상호작용을 일으키기 시작한 것.
▽시장의 작동=지금까지 미국의 에너지 절감 노력은 언제나 정부와 의회의 규제가 주도했다. 캘리포니아 주 의회가 올 1월 "2012년까지 에너지 낭비를 막기 위해 백열전구 판매를 금지시킨다"는 법안을 제출한 것이 전형적인 사례.
CBS 방송은 3일 "토머스 에디슨의 최대발명품이 128년 만에 최대 위기를 맞았다"고 보도했다. 아놀드 슈워제네거 주지사는 5일 워싱턴 프레스클럽 연설에서 "에너지 절약노력을 주도하겠다"며 이 법안의 통과의지를 분명히 했다.
환경친화적이지 못하면 '당위도 잃고, 경쟁에서도 밀린다'는 믿음이 시장에 퍼지면서 대기업과 금융권 역시 변화에 동참하고 있다.
자본주의의 첨병역할을 한 뉴욕 월스트리트의 시티그룹, JP 모건, 메릴 린치와 같은 투자은행이 그들이다. 뉴스위크는 4일 "미국 최대의 오염기업의 돈을 불려주는 일에 앞장서온 이런 투자은행이 고객사에게 '녹색(환경의식)이 검은색(흑자)의 출발점'이라고 조언한다"고 보도했다.
환경 애호가인 헨리 폴슨 재무장관을 배출한 골드먼 삭스는 경영자들이 휘발유와 전기에너지를 혼용하는 하이브리드(Hybrid) 승용차를 타는데 그치지 않고 2005년 희귀동식물의 자연 서식지에 큰 영향을 미치는 사업엔 투자하지 않는다는 것을 공식 정책으로 천명했다.
이 회사는 지구온난화의 공동 정범(正犯)처럼 불려 온 텍사스 주의 발전회사 TXU를 매입하려는 두 고객사에 "풍력 등 에너지 절약사업에 4억 달러를 투자하라. TXU의 11개 석탄 화력발전소 건설 가운데 9개는 취소하라"고 전했다.
리먼 브러더스도 지난주 '기후변화 지구위원회'라는 내부 조직을 만들고 환경대통령으로 알려진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의 증손자 시어도어 루스벨트 4세를 앉혔다.
포장지 낭비로 삼림을 훼손한다는 평을 들어온 월마트의 변신도 새롭다. 월마트는 납품업체를 상대로 '포장 간소화와 재생지 사용비율 제고'를 주문하기 시작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세계 최대 구매처인 월마트의 주문에 소비재 생산업체가 쩔쩔 매는 판"이라고 썼다. 이런 기업들은 미국 경제계에서 '흐름을 탄 기업(WaveRiders)'으로 불린다.
다니엘 에스티 예일대 교수는 4일 워싱턴포스트 기고문에서 "(기름 먹는 하마와 같은) 대형차를 만든 포드자동차의 추락과 이에 비해 에너지효율에 일찍이 눈뜬 도요타의 실적은 좋은 교훈이 된다"고 썼다.
이런 변화는 그동안 환경 노동 NGO의 주요 타깃이 돼온 '기업'이 주도권을 쥐고 시작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환경전문가들은 "이런 결정들이 환경인식 변화 때문인지 환경 NGO 단체의 압력을 사전에 봉쇄하려는 노력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 방향만큼은 긍정적으로 본다"고 평가했다.
▽소비자의 1차 반응=중국 인도의 경제성장, 중동 등 산유국의 정치 불안이 초래한 고유가 시대는 미국 소비자의 에너지 소비 자제로 나타나고 있다.
세계인구 4%인 미국인은 에너지의 35%를 소비한다. 독일 언론인 요제프 요프는 "이런 숫자를 접하는 유럽 아시아 중동 지역에서 '미우면서 부럽다'는 반미정서가 형성된다"고 지적한 바 있다. 역대 정권들이 미국의 대외이미지 개선을 위해서 에너지 독식현상을 바로 잡으려는 묘안 찾기에 골몰해온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미국인 개개인의 반응은 '자동차 천국'이라는 미국에서 1인당 주행거리가 25년 만에 처음으로 제자리걸음을 한 것에서도 잘 나타난다. 자동차에 기름을 가득 넣는 값이 2004년 25달러에서 2007년 45달러 정도로 껑충 뛴 것도 이유 중 하나다.
미국의 다급함은 부시 대통령이 올 1월 국정연설에서 "지구온난화가 미국에게 도전"이라는 말을 꺼낸 데서도 잘 나타나다. 부시 대통령은 1년 전에도 "미국은 석유중독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언급한 바 있지만 석유사업가답게 "소비를 줄일게 아니라 유전을 더 찾으면 된다"는 철학을 고수해왔다.
딕 체니 부통령도 2001년 에너지 보고서를 통해 "고유가는 피할 수 없지만 미국인의 생활패턴을 바꿔야 할 이유가 없다"는 공화당 본류의 에너지 철학을 강조한 바 있다.
워싱턴=김승련특파원 sr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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