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뮐라시옹(가장, 위장)’ 이론으로 유명한 고인은 1929년 프랑스 서부 랭스에서 태어나 고등학교 교사, 파리 10대학 교수 등을 지내며 50권 이상의 저서를 남겼다.
현대 사회의 본질을 파헤친 ‘시뮐라시옹’ 이론은 현대 사회에서 원본과 복사본, 현실과 가상현실의 경계와 구분이 모호해지며 차이가 없어진다고 해석한 이론이다. 현대사회를 모사된 이미지가 지배하는 ‘복제의 시대’로 설명한 것.
그는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실재물(實在物)에서 비롯된 ‘시뮐라크르(흉내, 환영)’들이 실재를 대체하고 있는 곳이라고 해석했다. 이 이론에 따르면 현대사회에선 생산물이 소비되는 게 아니라 기호가 소비된다. 현대인이 물건의 기능을 따지는 게 아니라 상품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권위’를 따져 상품을 구입하는 것도 이 같은 맥락으로 설명된다.
그는 1991년 ‘걸프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는 책을 써서 유명해졌지만 영미권에서는 비난을 받았다. 이 책에서 그는 “걸프 전쟁 때 세상에 알려진 모든 것이 실재와 달랐다”고 주장했다. 대중이 전쟁에 관해 가진 시각의 상당 부분은 TV를 통해 전해진 이미지에 의존한 것이며 사실상 사담 후세인은 패하지 않았다는 주장이었다. 그는 한 발 더 나아가 “미국을 중심으로 한 동맹군은 고전했고 전쟁 뒤에도 정치적으로 바뀐 건 없다”고 역설했다.
미국 뉴욕 9·11테러가 일어나자 그는 “테러는 부도덕한 짓이다. (그러나) 그것은 세계화에 대한 대응인데 세계화 또한 그 자체로 부도덕한 것이다”는 주장을 펴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그는 2005년 서울국제문학포럼 참석차 한국을 방문했을 때 “분단 상황이 사라지면 또 다른 형태의 대립이나 분쟁이 발생할 수 있다”면서 “한반도가 통일돼 물질적이고 가시적인 경계가 사라지면 문화적이고 비물질적인 분쟁이 유발될 수 있으므로 한국은 여기에 대비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그의 대표 저서로는 ‘위장, 가장’ ‘소비 사회’ ‘기호의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생산의 거울’ ‘침묵하는 다수의 그늘 아래서’ ‘시뮐라크르와 시뮐라시옹’ ‘숭고한 좌파’ ‘차가운 기억들’이 있다.
파리=금동근 특파원 gol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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