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지우고 싶은 스승, 앨린스키

  • 입력 2007년 3월 27일 02시 56분


젊은 날의 힐러리-오바마, 같은 급진 좌익운동가와 사상적 교류

미국 민주당의 대통령후보 자리를 놓고 치열한 경쟁을 펼치고 있는 힐러리 클린턴 상원의원과 버락 오바마 상원의원은 공통점이 많다.

시카고 연고(출생지, 흑인빈민운동 활동지역), 아이비리그 법과대학원 졸업(예일대, 하버드대), 10년 미만의 상원의원 경력(6년, 2년), 진보적 정책노선…. 최근 또 하나의 공통점으로 ‘솔 앨린스키’가 추가됐다.

워싱턴포스트는 25일 “급진적 사회운동가 솔 앨린스키(1909∼1972)에게 풀뿌리 조직운동의 중요성을 배웠다는 점에서 두 사람은 놀라운 인연이 있다”며 새로운 유사점을 조명했다.

힐러리 의원은 웰즐리대 졸업반 시절인 1969년 앨린스키의 급진적 운동을 졸업논문 주제로 삼았다. 논문 제목은 ‘싸움만이 있을 뿐이다: 앨린스키 모델의 분석’. 당시는 베트남전쟁 와중에 로버트 케네디와 마틴 루서 킹 목사가 암살되던 혼란기였다.

앨린스키는 1930년대부터 시카고 도축업체 노동자를 조직해 정부와 기업을 상대로 노동운동을 해 온 인물이다. 기성 선거제도를 부정하는 급진적 주장을 폈으며 1960년대 좌익 사상에 심취한 미국 젊은이들에겐 영웅적 존재였다.

힐러리 의원은 1968년 10월 학생회장으로 선출된 직후 앨린스키에게서 “함께 일하자”는 제안도 받았으나 이를 거절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로부터 17년 뒤. 컬럼비아대를 갓 졸업한 청년 오바마는 시카고를 찾았고, 이미 숨진 앨린스키의 문하생에게서 지도를 받으며 흑인조직의 정치세력화를 기획했다. 그는 훗날 회고록에서 당시의 생활을 ‘내 생애 가장 훌륭한 가르침’으로 불렀다.

그러나 두 사람은 모두 워싱턴포스트의 인터뷰 요청을 거절했다. 앨린스키와 연관되는 것 자체가 중도파 유권자의 반감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힐러리 의원은 대통령 부인 시절인 1990년대 공화당으로부터 졸업논문의 ‘급진성’에 대한 공격을 받아 왔다. 당시 웰즐리대는 백악관의 요청에 따라 이 논문에 대해 한시적 비공개 결정을 내리기도 했다.

두 사람이 앨린스키에게서 받은 영향에는 다소 차이가 있다. 오바마 의원이 당시 앨린스키 방식을 체화했다면, 힐러리 의원은 이론적 접근에 그쳤다는 평가도 있다.

실제로 힐러리 의원은 현역 정치인이 된 후 다양한 목소리를 수용하겠다는 ‘큰 천막론’을 내놓으며 다소 중도적으로 돌아섰지만 오바마 의원은 더 선명한 진보노선을 앞세우고 있다.

워싱턴=김승련 특파원 sr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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