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간 매년 1권씩 집필해 지난해 말 ‘로마인 이야기’를 완간하고 휴식에 들어간 시오노 나나미(鹽野七生·70) 씨. 최근 도쿄(東京)에 들른 그가 동아일보 창간 87주년 기념 인터뷰에 응했다. ‘세계인’으로서 자유분방하고 열린 자세로 말하는 그에게서 1300년 로마 역사를 온몸으로 살려낸 작가로서의 통찰력이 엿보였다. 인터뷰는 26일과 28일, 그가 머물고 있는 호텔에서 모두 4시간에 걸쳐 이뤄졌다.》 ●“지도자에겐 상대의 속을 읽는 인텔리전스가 필요” ―로마사는 지도자론, 조직론, 국가론 등에 폭넓게 인용된다. 당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지도자의 자질은 무엇인가. “줄리우스 카이사르의 경우 지력, 설득력, 육체적 내구력, 지속하는 의지, 자기제어 등 다섯 가지를 갖췄다. 지도자에게는 ‘현상의 보이지 않는 이면까지도 볼 수 있는 능력, 상대의 속을 읽는 인텔리전스’가 필요하다. 또 하나, 진짜 리더는 모두 자극적이다. 타인에게 자극을 준다는 뜻이다. 권력은 새로운 생각을 갖도록 하는 힘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도 늘 거론된다. “로마의 힘은 국민의 안전을 보장하는 인프라 구축과 노블레스 오블리주에서 나왔다. 국민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시큐리티 즉, 안전이다. 그 다음은 긍지와 쾌적한 생활이다. 로마의 리더들은 이러한 국민의 필요를 충족하기 위해 봉사했다.” ―로마는 ‘평화’를 위해 수많은 전쟁도 치러야 했다. “로마인은 수많은 전쟁에서 이겼다. 그러나 이기고 난 뒤에는 양보했다. 중요한 것은 이기지 않고 양보하면 질서가 생기지 않는다는 점이다. 로마인은 피정복민에게도 시민권을 주고 과감히 요직에 등용했다. 피정복민족 출신 로마 황제가 줄줄이 나왔다. 로마는 일종의 다국적 기업이었고, 그 소프트웨어는 ‘로마법’이다.” ―일본의 정치가는 어떤가.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전 총리와 친한 것으로 안다.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말이 마키아벨리의 ‘지도자는 지옥으로 가는 길을 숙지하고 있어야 대중을 천국으로 이끌 수 있다’라고 했다. 그래서 ‘대중을 천국으로 이끌되 지도자 본인은 지옥으로 떨어지는 거다. 괜찮으냐’고 했더니 웃었다.” ●“정치는 필연적으로 싸움이고 드라마… 연출도 필요” ―고이즈미 총리에서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로 바뀌면서 리더 한 사람으로 분위기가 확 달라지는 걸 실감했다. “정치는 필연적으로 싸움이고 드라마다. 연출도 필요하다. 그게 싫고 못하겠으면 정치가가 아니고 관료를 해야 한다.” ―지도자의 ‘말’에 초점을 맞춰 봐도 재미있을 것 같다. 요즘 아베 총리의 군위안부에 대한 ‘협의의 강제성’ 발언 때문에 국제적인 비난을 사고 있다. “아베 총리는 말을 너무 많이 한다. 진지하게 설명하려 하고, 속마음을 숨기질 못한다. 최근의 군위안부 발언은 해서는 안 되는 말이었다. 정치가는 높은 자리에 있을수록 말에 유의해야 한다. 생각나는 대로 말하는 사람은 지도자가 돼선 안 된다. 아래의 사람들에게도 불행이다.” ―고이즈미 전 총리의 ‘원 프레이즈’ 정치와는 정반대다. “그는 말을 잘 고르는 편이다. ‘원 프레이즈’로 명료하게 말하되 사실은 말을 아낀 것이다. 대중이란 구체적으로 말해 주면 옳은 판단을 하는 편이다. 추상적으로 말하면 엉망이 된다. 성의껏 속을 드러내는 아베 총리는 지도자보다는 남편감으로 적당하다. 하지만 고이즈미 전 총리 같은 사람이 남편이라면 고생이 많을 거다(웃음).” ―보좌도 중요한 것 같다. 고이즈미 전 총리에게는 이지마 이사오(飯島勳)라는 비서관이 있어 헌신적으로 보좌한 반면 아베 총리 주변에는 헌신적으로 보좌하는 사람이 없다는 지적이 많다. “정치의 세계란 본래 이해관계의 이합집산이라고 하지만 역시 리더에게는 ‘인간의 매력’이란 게 작용한다.”
●“한국은 지속가능한 시스템을 내다봐야” ―한국에도 ‘로마인 이야기’의 독자층이 두텁다. “그런 어려운 책이 잘 팔린다는 것은 한국 독자의 수준을 말해 주는 것 아닐까. 자랑은 아니지만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이 아니다. 나는 ‘로마인’을 쓰는 15년간 다른 일은 일절 거절하고 그 책의 인세만으로 살았다. 책을 사서 읽어 준 독자들은 지난 15년간 내 작업에 참여한 셈이다.” ―시오노 씨가 보는 한국은 어떤가. “한국에는 딱 두 번 가 봤다. 그때 느낀 것은 한국과 일본의 가장 큰 차이는 그 사이에 바다(동해)가 있다는 점이다. 일본은 바다가 지켜줘 외부로부터 침략이 불가능했다. 도쿠가와(德川) 바쿠후(幕府) 300년간 국내도 평화로웠다. 그 사이 장기적인 시야에서 이것저것 새로운 시도를 해 보고 축적할 수 있었다. 반면 한국은 조선 400년간 자체의 영속적인 시스템을 마련하지 않고 일시적인 대응만 해 왔다는 느낌이다. 바로 곁에 스스로를 세상의 중심이라 여기는 중국이 있어 항시 의식하며 살아야 해서인지도 모른다.” ―그래도 한국은 5000년간 독자적인 국가를 운영해 왔다. 100년 전이건, 지금이건 미-일-중-러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활로를 모색하는 신세이기도 하다. “한국은 요리를 봐도 그렇고, 모든 점에서 ‘낭비(쓸데없는 노력)’가 없는 것이 문제 아니냐는 생각도 들더라. 일본 요리를 보면 쓸데없는 데 열심히 공들인 것이 많다. 그러나 실은 새로운 것, 창조적인 것은 이런 쓸데없는 노력에서 태어나는 경우가 많다. 일본 기업들은 당장 돈이 되지는 않는 일에도 10년 뒤를 바라보며 투자하고 노력을 기울인다. 그리고 결국 이런 것이 효자 노릇을 한다. 한국은 그런 ‘잉여적 요소’가 잘 안 보인다.” ―여유 없이 살아왔기 때문 아닐까. “여자 피겨스케이트의 경우를 보면, 나는 이번 도쿄대회에서 1, 2위를 한 일본 선수들보다 김연아가 한수 위라고 본다. 우아(elegant)하기 때문이다. 이건 노력만으로 되는 부분이 아니다. 다만 김연아가 쓰러지면 어떻게 될까. 일본은 1등은 아니어도 그런 수준에 가 있는 선수가 5명 정도 있어서 한 사람이 망가지면 다른 사람이 도전한다. 한국은 어떤가. 무언가에서 한 번 승리하는 것은 쉽지만 그걸 지키기는 어렵다. 이제부터는 시스템을 마련해야 한다. 영화건 경제건 모두 해당되는 얘기다.” ●“실패를 통한 반성 없이는 원리주의에 빠져” ―‘로마인 이야기’는 현대 문명에 대한 함의로 가득 차 있다. 이 책을 쓰게 된 동기로 200여 년 동안이나 넓은 지역에 걸쳐 ‘팍스 로마나(로마의 평화)’가 이뤄진 이유를 알고 싶었다는 말을 했다. “로마의 특징은 ‘자유’와 ‘관용’이다. 이는 다신교에서 나왔다. 로마인들은 정복당한 민족의 신조차 모두 자신들의 신으로 모셔 로마의 신은 30만에 이르렀다. 반면 일신교는 나의 종교만이 옳고 남의 종교는 그르다는 생각에 기초하고 있다.” ―기독교와 이슬람, 두 개의 일신교가 부딪치는 현대는 어찌 보면 중세의 재도래인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기독교는 그래도 중세 이후 르네상스와 계몽주의, 두 번의 대전을 치르면서 자기반성의 기회가 여러 차례 있었다. 그러나 이슬람은 한 번도 실패를 통한 반성의 기회가 없었다. 원리주의가 힘을 떨치는 이유다. 그래서 무섭다.” ―북한 요소도 있고 동아시아 정세도 만만치 않을 듯하다. “가끔 한국(북한 포함)은 너무 원리주의적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이거다’ 하면 그것밖에 모르고, 유연하지 않다. 그런 점에서는 한국인은 이탈리아인보다는 프랑스인과 유사하다. 프랑스는 전략적으로 사고하지 않고 ‘미국에 반대하면 선(善)’인 것처럼 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무엇이 자국에 유익한가를 생각해야 한다.” ●“국제사회에서도 리더가 필요하다” ―요즘 한국의 유행어는 ‘샌드위치 국가’다. “일본은 외국과 사귀는 데 서툴다. 말도 잘 못한다. 민주니 자유니 하는 추상적인 것에 약한 대신 물건은 잘 만든다. 이런 일본이 ‘대국’ 운운하면 난 웃어 버린다. 한국이나 일본은 ‘중’ 정도 되는 나라다. 서로 힘을 합해야 한다. 중국의 부상에 대비해서도 그렇다. 중국이 패권을 장악하면 어떻게 될지, 역사를 잘 들여다봐야 한다.” ―중국에 대해 좋은 평가를 하지 않는 듯하다. “기원전 2세기∼기원전 3세기, 로마와 중국은 기술 수준이 비슷했다. 하지만 한 일은 달랐다. 로마가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며 속주 국가들에까지 도로를 닦아 주고 수도를 공급한 데 비해 중국에서는 만리장성을 쌓았다. ‘열린 제국’과 ‘닫힌 제국’의 차이는 엄청나다.” ―현대의 ‘로마제국’은 역시 미국인가. “군사적으로 보나 경제적으로 보나 그렇게 기대하고 싶지만 미국은 그럴 뜻이 별로 없다. 국제사회에서도 리더는 필요한데, 미국이 너무 자국만을 생각해 유감이다.” ―한일 간 역사 문제는 전후 60년 이상 지났지만 아직도 해결되지 않았다. “역사에 대한 해석은 본래 국가별로 제각각이다. 그러나 ‘사실’에 대해서는 공유할 수 있고, 상대방의 해석을 이해할 수는 있다. 좋은 예가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이 지난해 개봉한 이오지마(硫黃島)를 다룬 두 영화다. 적국으로서 전투에 참여한 미국과 일본의 이야기를 두 편의 영화로 엮어냈다. 유럽 역사학계에서는 이에 대해 ‘콜럼버스의 달걀’이라고 한다. 쉬운 일이지만 아무도 생각지 못했다는 것이다. 군위안부 문제도 마찬가지다. 사실부터 정확히 알아보는 게 먼저다.” ―앞으로의 계획은…. “올해는 15년분의 휴가를 쓰려고 한다. 사람이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조금씩 자신의 가능성을 지워 나간다는 뜻이기도 하다. 아무리 낙관적으로 봐도 내가 작가 생활을 할 수 있는 기간은 10년밖에 남지 않았다. 올 한해, 그 10년간 무엇을 할지 생각해 보려 한다. 또 하나, ‘로마인 이야기’ 영역(英譯)을 준비 중이다.” 도쿄=서영아 특파원 sy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