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제국주의 시대나 패전 이후나 참으로 칼질 잘하는 ‘검(劍)의 민족’이다. 1960년 오늘, 한국에서는 4·19 학생 시위대가 대통령 관저 쪽으로 몰려가자 경관들의 발포로 삽시간에 200여 명의 젊은이가 목숨을 잃고 2000여 명이 부상하는 참극이 벌어졌다.
같은 해 일본에서는 사회당의 아사누마(淺沼) 당수가 백주에 도쿄의 공회당에서 연설 도중 극우파 청년에게 자살(刺殺)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 얼마 전에는 오늘의 일본 아베(安倍) 총리의 외조부 기시(岸信介) 총리 역시 자객의 습격으로 허벅지에 칼을 맞았다. 두 사건은 내겐 오랫동안 하나의 수수께끼로 남겨졌다. 아프리카의 후진국도 살인에는 총을 쏘는 문명시대에 선진국 일본에서는 왜 아직도 칼을 쓰는지…. 이 우문(愚問)을 풀어 주는 데엔 루스 베네딕트의 책 ‘국화와 칼’이 큰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더욱 나를 계몽시켜 준 책은 노엘 페린의 ‘총을 버리다(Giving up the gun)’였다.
버지니아 참사… 나가사키 테러
1543년 일본에 표류한 유럽의 뱃사람이 전한 총을 스스로 제작하게 되자 일본은 불과 50년 후인 16세기 말엔 총포의 절대 수에서 당시 세계 최대의 보유국이 됐다고 페린은 밝히고 있다.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 중국 필리핀을 정복해 보겠다는 야심을 품게 된 배경이다. 만일 도요토미의 공격명령이 조선이 아니라 필리핀으로 떨어졌다면 1592년 이후 마닐라는 일본인 타운이 됐을 거란 데에 거의 모든 군사 사학자의 견해가 일치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총포 대량 보유국 일본이 17세기의 도쿠가와 쇼군 시대에 들어와 돌연 총을 포기하고 다시 칼을 쓰는 대검(帶劍)의 전통에 복귀하게 된다. 아마도 세계 군축 역사상 전무후무한 성공사례라고 평화주의자 페린은 적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페린이 자기 책을 ‘평화주의자는 아니었지만 총을 싫어했던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에게 바친다’는 헌정사. 잘 알려진 대로 미시마는 일본 군국주의의 부활을 기원하며 자위대 본부 발코니에서 칼로 할복자살한 전후의 대표적 작가이다.
나는 피해자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 먼 거리에서 말하자면 ‘리모컨 살인’을 하는 총의 추상적인 잔인함을 혐오한다. 그러나 그보다도 피해자의 얼굴을 보고 육체적 저항을 체감하며 명줄을 끊는 칼의 구체적 잔인함엔 더욱 소름이 끼친다.
구름 위 상공에서 원폭을 투하한 히로시마의 공습은 20세기 문명이 도달한 가장 잔인한 추상적인 집단살인이었다고 한다면 땅바닥에 덮치거나 꿇어앉혀 총검으로 수(십?)만 명을 1 대 1 학살한 난징 대학살은 20세기 문명 속에서도 자행된 가장 야만스러운 구체적인 집단살인의 지옥도였다. 어느 쪽 가해자가 더 또는 덜 잔혹한 것인지, 어느 쪽 피해자가 더 또는 덜 고통스러운 것인지…. 나는 그저 소름이 끼칠 따름이다.
분명한 사실은 그러한 야만성과 잔인성을 화려한 의상으로 치장하고 아름다운 음악을 들으며 봄꽃이 쉬이 져 버리는 무상함을 아쉬워하는 우리의 문명이라는 것이 실은 그 껍질이 얼마나 형편없이 얄팍한가 하는 점이다. 바늘로 조금 긁어도 금방 선지피가 뚝뚝 떨어지는 우리들 몸뚱이처럼 문명의 껍질도 조그마한 외적 내적 자극에 금세 유혈이 낭자한 야만극을 벌임을 우리는 지난 세기에 숱하게 경험했다.
야만 치장한 문명의 허약한 껍질
그게 지난 세기만의 일이라 장담할 수 있는가. 그러한 야만극에 우리는 언제나 가해자 아닌 피해자라고만 할 수 있겠는가. 미국 역사상 최악의 총기 난사 사건이라고 하는 버지니아 공대의 대학살 주범이 한국인 교포 학생이란 보도 앞에서 나는 어떤 말도 할 수가 없다.
같은 날 일본의 반핵 평화주의자인 나가사키 시장이 야쿠자에게 습격당해 절명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이번에는 칼이 아니라 마침내 총으로…. 그러나 총과 칼이 다를 게 무엇이란 말인가.
최정호 울산대 석좌교수·본보 객원大記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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