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 내부에는 “민간 관료들을 더는 믿을 수 없다”는 여론이 들끓고 지난해에는 예비역 장성들이 집단으로 국방장관 사퇴를 촉구하는 ‘장군들의 반란’이 일어났다. 더욱이 최근에는 현역 장성들이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이라크 병력 증강 정책에 공개적으로 반대하기도 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6·25전쟁 과정에서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 해리 트루먼 대통령에게 반기를 든 이래 반세기 만에 민-군 관계는 최악에 달했다는 평가와 함께 이런 갈등을 더는 방치해서는 안 된다는 경고가 잇따르고 있다.
마이클 데시 텍사스A&M대 부시스쿨(행정대학원) 교수는 외교 전문지 포린어페어스 5·6월호에 기고한 ‘부시 대통령과 장군들’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이 같은 민-군 갈등의 원인을 분석한 뒤 나름의 해법을 제시했다.
데시 교수는 먼저 “민-군 갈등은 이라크전쟁 탓만은 아니다”라며 오랜 갈등의 역사를 짚었다. 갈등의 시작은 베트남전쟁이었다. 1967년 합동참모본부 장성들은 공중 폭격과 지상전 확대를 밀어붙이는 민간 지도부에 반대해 집단 사퇴 움직임까지 비쳤으나 불발에 그쳤다.
이후 민-군 갈등은 냉전이 계속되면서 일단 잠복했지만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었다. 군내에는 ‘할 말은 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확산됐고 군사력은 매우 제한적으로 사용해야 한다는 콜린 파월 합참의장의 ‘파월 독트린’으로 구체화됐다.
그러나 빌 클린턴 행정부가 대규모 국방 예산 및 인력 감축과 함께 군내 동성애자 관용 정책까지 추진하자 갈등은 다시 수면으로 떠올랐다. 특히 코소보전쟁 때 지상군 투입에 반대하던 군은 아파치 공격용 헬기 배치를 몇 주씩이나 지연시키며 사보타주로 맞섰다.
대통령선거 기간에 “군의 사기 진작을 최우선으로 추진하겠다”고 공언했던 부시 행정부는 어땠을까. 도널드 럼즈펠드 국방장관은 취임 직후 미군 구조를 근본적으로 재편하는 작업(transformation)을 밀어붙였다. 군의 저항은 컸지만 9·11테러가 저항의 분출을 막았다.
하지만 부시 행정부의 이라크 침공 계획이 구체화하면서 다시 갈등은 노골화됐다. 폴 울포위츠 국방부 부장관은 대규모 병력이 필요하다는 에릭 신세키 육군참모총장의 의견을 묵살했고 이제 이라크전쟁 실패 책임론을 둘러싸고 민-군 간에 손가락질이 한창이다.
왜 이 지경이 됐을까. 데시 교수는 그 이유를 부시 행정부 내 핵심 인사들의 군에 대한 잘못된 인식에서 찾았다. 특히 ‘불칸집단’으로 불린 핵심 그룹은 ‘클린턴 행정부가 군 장악에 실패했다’는 판단 아래 강력하게 군을 장악하기 위해 세부 군사문제에까지 깊숙이 개입했다는 것.
네오콘(신보수주의) 그룹의 대표적인 논객 엘리엇 코언 국무부 자문관은 “군의 관료주의적 저항과 무능력을 극복하기 위해 럼즈펠드 장관은 고위 군 지휘부를 밀어붙이고(push) 조사하고(probe) 캐묻는(query) 등 매우 적극적인 장관이었다”고 평가했다.
코언 자문관의 저서 ‘최고사령부’는 일찍이 부시 대통령의 애독서 중 하나였다. 데시 교수는 “부시 대통령이 코언 자문관의 책이 아닌 새뮤얼 헌팅턴 하버드대 교수의 책을 읽었다면 이 지경은 안 됐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헌팅턴 교수가 ‘군인과 국가’(1964년)에서 제시한 모델이 그 해법이라고 강조했다. 즉, 군은 민간 지도부의 국가 전략과 정치적 결정에 완전 복종하고 민간 지도부는 ‘전술과 작전’ 영역에서 군의 전문성을 인정해 주는 역할분담 체제로 복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철희 기자 klim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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