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1월 베트남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때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는 조지 W 부시 대통령에게 오래된 사진 한 장을 선물했다. 아베 총리의 외할아버지인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전 총리가 1957년 부시 대통령의 할아버지인 프레스콧 부시 상원의원,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골프를 치는 모습이다.
각각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총리, 외무상(아베) 상원의원, 대통령(부시)을 지낸 ‘뼈대 있는 가문’이란 공통점을 강조하면서 “우리도 할아버지들처럼 가깝게”를 강조한 것이다.
그러나 그 뒤 미일 관계를 둘러싼 주변 여건은 아베 총리가 꿈꿨던 밀월의 환경과는 다른 쪽으로 흘러 왔다.
북핵 문제에 대한 부시 행정부의 정책 급선회는 납북자 문제를 둘러싸고 양국 간에 괴리를 가져왔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아베 총리의 ‘망언들’은 이 문제에 무관심하던 미국 주류 언론과 시민사회를 자극했고 백악관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난처한 지경에 빠졌다.
이를 만회해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총리 때의 ‘밀월관계’ 재진입을 희망하며 방미한 아베 총리에게 부시 대통령은 일단 선물을 안겨 줬다.
26일 오전 정상회담에서 “납치 문제 해결 없이는 북한과 국교 정상화는 할 수 없다”는 아베 총리에게 부시 대통령은 “미국은 납북자 문제를 테러지원국 이슈와 분리하지 않을 것임을 북한에게 분명히 주지시켜 왔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라고 화답한 것으로 알려졌다.
국무부가 머지않아 테러지원국 명단을 발표할 예정인데 완전히 빼 달라는 북한의 요구가 이번엔 받아들여지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군위안부 문제도 아베 총리가 방미 전에 미국 언론들과 잇달아 기자회견을 열고 ‘서양인 시각’으로 보면 사과로 비칠 만한 발언을 거듭하고 부시 대통령과의 통화에서도 해명을 함으로써 걸림돌이 상당히 제거됐다는 게 미 행정부 관계자들의 해석이다.
쇠고기 시장 개방을 비롯한 경제 현안은 갈등의 소지가 크지만 그 나름의 논리로 굴러가고 있다.
양국 정상이 가장 관심을 두는 군사동맹은 갈수록 공고해지고 있다. 백악관이 아베 총리 방미에 맞춰 외국에의 판매가 금지된 최첨단 전투기 F-22(랩터)의 판매를 긍정적으로 검토한다고 밝힌 것도 미일 관계에 대한 의지를 과시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앞서 일본은 국내 반발 여론을 무릅쓰고 오키나와(沖繩) 주둔 미 해병대의 미국으로의 이동 배치 비용 가운데 60%(60억 달러)를 지원하는 등 미일 동맹을 위해선 무엇이든 하겠다는 의지를 먼저 보였다.
부시 행정부에 있어서 일본은 이라크 재건에 120억 달러를 원조한 가장 큰 기여자이며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세 번째 원조국이다. 일본-호주-인도를 묶어 중국을 견제하는 아시아태평양 지역 ‘민주주의 국가 라인업’의 핵심으로서 ‘동아시아 최대의 전략적 파트너이자 없어서는 안 될 지구적 동반자’(데니스 와일더 백악관 보좌관의 표현)다.
물론 미일 관계가 고이즈미-부시 시절의 ‘특별한’ 수준으로 다시 올라서려면 시간이 걸릴 것이란 전망이 많다. 두 정상 간의 개인적 친밀감이 아직 형성되지 않았고 관련 이슈들도 고이즈미 시절에 비해 어렵다.
방미 첫날인 26일 저녁 미일 정상 부부의 만찬에는 왕년의 퍼팅 황제인 골프 스타 벤 크렌쇼 부부가 초청됐다. 골프 애호가인 아베 총리를 배려한 것이다. 이어 27일의 캠프데이비드 산장 정상회담 후 모두 야구팬인 두 정상이 함께 공 던지고 받기를 할 가능성을 미국 언론들은 주시했다. ‘엘비스 프레슬리’의 팬이라는 공통점이 부시와 고이즈미의 우정을 만들어 줬듯 양국 정상은 어떡하든 개인적으로 친해질 계기를 만들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워싱턴=이기홍 특파원
sechep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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