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4년 10월 서베를린의 슬라바 초청 공연은 여러모로 관례를 초월한, 궤도를 일탈한 콘서트였다. 동서 냉전의 전초 도시인 서베를린의 예술제에 레닌 상과 스탈린 상을 탄 ‘소비에트연방 인민예술가’가 참가했다는 사실 자체가 관례를 깬 일이었다.
이날 밤 전반부의 레퍼토리는 두 작품 다 슬라바에게 헌정(獻呈)된 작품이다. 벤저민 브리튼이 그해에 쓴 ‘첼로 협주곡’(op. 68)과 노(老)거장이 20대 제자를 위해 쓴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의 ‘첼로 협주곡’(op. 125).
당시 37세인 슬라바의 연주는 한마디로 불덩이였다. 그 불덩이는 지휘자에게 불붙고 협주하는 오케스트라를 불태우고 만당의 청중을 한 도가니 안에 녹여 버렸다. 자신을 위해 작곡된 곡을 자신이 연주한 슬라바는 등 뒤의 오케스트라도 자신이 지휘하려는 듯, 심지어 지휘자조차도 지휘하려는 듯싶었다.
1964년 열광의 베를린 공연
첼로에서 손이 쉴 때마다 머리를 뒤로 돌려 생동하는 미믹과 시사적인 제스처로 교환(交歡)을 하고 콧김도 요란하게 기합을 넣고 왼쪽 어깨를 흥겹게 휘저으며 장단을 치고, 그러다간 두 팔로 그리고 급기야는 구둣발로 박자를 맞추는 슬라바. 그러면서도 티끌만큼도 소홀히 되지 않는 커다란 음악적인 조화, 부드럽고 따스한 저음, 순수의 극을 긋는 고음의 데스캔트(최고음부)…. 브리튼의 협주곡이 겨우 2악장이 끝나자마자 연주 중간에 박수가 터졌다. 필하모니의 세련된 청중도 평소의 자제를 동댕이치고 말았다.
프로코피예프의 곡이 끝날 무렵 국면은 더욱 걷잡을 수 없었다. 연주회 진행은 궤도를 이탈해 40분이나 지체됐고, 그 사이 필하모니 연주회에 전례 없는 앙코르 연주가 청중 성화에 세 차례나 있은 뒤 슬라바는 지휘자며 콘서트마스터를 마구 포옹하고 두 볼에 러시아식 키스를 퍼부었다.
‘만성적인 도취 상태에 있는 사람’(메뉴인) ‘그리스 말의 근원적인 의미에서 신들려 있는 사람’(번스타인)이란 소문의 실체를 나는 본 것이다.
그로부터 10년 후 소련 인민예술가 칭호를 박탈당하고 해외 공연도 금지된 슬라바는 1974년 서방으로 망명한다. 그는 한국에도 올 수 있게 됐다. 그래서 그의 가장 감동적인 다른 공연이 1988년 3월 서울에서 벌어졌다
그는 베토벤, 바흐, 쇼스타코비치, 라흐마니노프 등의 작품과 함께 극한의 테크닉을 요구하는 자작의 비르투오소 곡 ‘유모레스크’ 등을 통해 ‘천사들도 그 소리에 운다’는 부드럽고 따스한 저음, 연주라기보다 곡예를 보는 듯한 고음의 온갖 기교를 아낌없이 시위해 주었다.
공연 후 앙코르를 요구하는 청중의 환호에 두 번이고 세 번이고 스트라디바리우스의 명기를 번쩍 들고 나와 추가 곡을 선물하는 활수(滑手)한 인품.
네 번째 앙코르 요청으로 다시 무대에 나왔을 때 감동적인 이변이 벌어졌다. “이번 곡은 여태껏 내 등만 쳐다보고 있는 무대 뒷좌석의 친구들을 위해 연주하겠다”는 인사말과 함께 슬라바는 의자를 180도로 돌렸다. 무대 뒤 좌석을 향해 대부분의 청중에겐 등을 돌린 채 연주한 것이다. 슬라바다운 훈훈한 인간애가 물씬 풍기는 해프닝이었다.
같은 하늘 아래 숨쉬진 않지만…
청중은 볼이 벌겋게 흥분하고 감동해 버렸다. 연주회장을 나오면서 ‘디자인하우스’의 이영혜 사장은 “저런 거장과 같은 하늘 밑에 숨 쉬고 있다는 것이 행복하기만 해요” 하고 소녀처럼 천진스러운 말을 내뱉었다.
그 슬라바가 이제 우리와 같은 하늘 밑에 숨 쉬지 않고 떠나 버렸다. 나는 문득 W H 오든의 시를 떠올리며 그를 고쳐 써 보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힌다.
“이 불쌍한 지구에 해를 입히지 않고/수많은 사람을 감동시킨 음악가의 죽음을 애도한다는 것은/얼마나 예의 바른 일인가/우리들이 사자(死者)를 칭송하는 동안/우리들은 잊어선 안 된다/장한나와 장영주와 김선욱이 아직 우리와 더불어 있다는 것을/그들을 지켜 주소서.”
최정호 울산대 석좌교수·본보 객원大記者
구독
구독
구독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