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일 노동절의 한 풍경이 대표적이었다. 모스크바 크렘린 옆 붉은광장에서 열린 집회에서 러시아 여당인 통일러시아당 지도부는 ‘연금 6배 인상’을 외쳐 댔다. 12월 총선에 대비해 연금생활자들의 표를 의식한 것이겠지만 어쩐지 어울리지 않았다. 이유인즉 통일러시아당은 1999년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대선에 나설 때 급조된 정당으로 이념적 지향은 우파에 가까운데 좌파의 구호를 외치고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연금은 선진국처럼 개인이 내는 보험료가 아니라 국고나 다름없는 연금 펀드에서 직접 나온다. 요즘 연금 펀드는 석유수익금으로 채워진다. 그리고 연금 펀드를 늘려 더 많이 분배하라는 구호는 러시아 좌파가 즐겨 써 온 상투어다.
1917년부터 1991년까지 노동절마다 붉은광장에서 관제 데모를 벌였던 공산당을 닮아 가려고 애쓰는 듯한 러시아 여당을 보면 러시아에서 좌파의식의 뿌리와 잔재가 얼마나 깊은지 짐작이 간다.
여당의 주장과는 달리 여당이 받드는 푸틴 대통령은 연금은 60%만 올리고 나머지 ‘오일 머니’는 사회간접자본 투자와 기업 육성에 써야 한다고 자주 얘기한다. 하지만 잘 먹히지 않는 때가 있다. 러시아 정부 고위 관료들을 만나 보면 유가 인상으로 풍부해진 국고를 어디에다 써야 하는지 잘 안다. 그런데 실행을 못한다. 미래를 위해 투자하기보다는 당장 나눠 달라고 하는 ‘사회주의 시대의 분배 요구 타성’이 크렘린의 정책 집행을 가로막는다.
러시아 좌파들의 구호는 선명해서 대중적 공감을 쉽게 얻을 수 있다. ‘당장 돈을 나눠 손에 쥐여 주겠다’는 데 반대하는 사람은 드물다.
‘좌파적 분배 욕구’의 덫에 걸린 것은 러시아뿐만이 아니다. 동유럽권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벌어져 우매한 결과를 낳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삼성물산이 인수한 루마니아 스테인리스강 공장 오텔리녹스 근로자들의 임금 협상이 대표적인 예. 회사 측은 근로자의 능력과 실적에 따라 임금 인상률에 차등을 두는 인센티브제를 제시했다. 이 제도를 도입하면 평균 임금이 1인당 110달러가량 오른다.
그런데 사회주의 풍습에 젖어 있던 노조는 회사가 불평등을 조장한다며 일률적인 인상안을 고집했다. 그러면서 노조가 제시한 임금 인상폭은 75달러였다. 회사는 노조 안을 받아들였다.
오일머니 분배 요구 외에 러시아에 남아 있는 대표적인 좌파적 유산은 사회 곳곳에서 발견된다. 낡은 의료체계도 그중 하나다. 옛 소련에서 물려받은 의료체계는 사회주의 당시 ‘무상진료’로 선전됐지만 이제는 그 실상이 잘 알려져 있다.
모스크바에서 16년째 거주해 온 교포 조모 씨는 최근 배가 아파 응급차 호출 전화번호인 03을 눌렀다. 그러나 응급차가 도착한 시간은 40분이 지난 뒤였다. 응급실에서 데굴데굴 구르며 기다리다 주사를 맞기 위해 병상을 옮겨 달라고 호소했지만 의사나 간호사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조 씨는 의료진 몇 명에게 500루블씩 나눠 준 뒤에야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평등한 공짜 치료의 허울 뒤에는 생명을 위협할 수도 있는 부실한 의료체계가 있었다.
러시아는 앞으로도 상당 기간 평등 분배를 외치는 ‘좌파 환자’를 고치는 데 많은 사회적 비용을 들여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한국에서도 지나치게 ‘좌파 이념’에 향수를 갖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러시아의 좌파를 보라고 권하고 싶다.
정위용 모스크바 특파원 viyonz@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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