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근로자들을 노린 나이지리아 무장단체의 납치사건이 지난해 6월 이후 3차례나 발생함에 따라 현지에 진출한 한국 기업들의 우려가 커지고 있다.
나이지리아는 중앙정부의 행정력이 사실상 지방에는 미치지 못하는 데다 지역을 거점으로 한 무장단체들이 난립해 있어 치안이 극도로 불안한 상태다.
특히 지난달 대통령 선거 이후 시위와 폭력사태가 잦아졌다. 국가정보원에 따르면 현지 무장괴한 8, 9명은 1일에도 포트하커트 인근 대우건설 공사 현장을 공격했던 것으로 확인됐다.
○ 중무장 괴한 50∼100명 난입
이번에 대우건설 직원들이 납치된 화력발전소 현장은 대우건설의 나이지리아 본부가 있는 포트하커트에서 차로 1시간가량 떨어진 리버스 주 아팜 지역이다.
대우건설은 이곳에서 650MW급 발전소를 짓고 있다. 근무 인원은 한국인 145명과 필리핀인 등 68명, 나이지리아 근로자 1541명 등 1754명.
사건 당시 현장에 있었던 이재현 부장에 따르면 숙소에서 자고 있던 직원들이 총소리를 처음 들은 것은 3일 오전 1시(한국 시간 3일 오전 9시)경이었다.
25분가량 뒤인 1시 25분경 50∼100여 명으로 추정되는 괴한들이 기관총과 다이너마이트 등으로 무장한 채 현장을 덮쳐 총기를 난사했다.
올 1월 피랍사건 후 대우건설은 경비를 대폭 강화해 현지 군인 13명, 무장경찰 7명, 자체 경호원 45명 등 65명을 현장에 배치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교전 중 군인 1명과 신원이 밝혀지지 않은 민간인 1명이 숨지고 경찰 1명이 부상했다.
총격전이 벌어지는 가운데 괴한 7명은 오전 1시 45분경 발전소에서 300m가량 떨어진 숙소에 침입해 정태영 상무, 안종태 전문위원(상무급), 하익환 부장 등을 납치한 뒤 오전 2시경 차를 타고 사라졌다. 괴한들은 현장에 있던 쏘렌토 승용차 한 대도 탈취했다.
함께 납치된 나이지리아인 운전사는 30분 뒤 풀려나 20km를 걸어 오전 6시경 현장에 귀환했다.
대우건설과 외교통상부는 사건 발생 직후 휴대전화로 이 같은 사실을 보고받고 대책 마련에 착수했다.
대우건설 직원들은 작년 6월과 올해 1월에도 포트하커트 서쪽 지역에서 2차례 납치됐다 풀려났다. 하지만 임원이 피랍되기는 이번이 처음이어서 몸값을 높게 부르기 위해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된 범행일 것이라는 예상이 많다.
특히 정 상무는 대우건설의 해외사업을 전담하는 임원으로, 사건 하루 전인 2일 현지에 들렀다 이 같은 변을 당했다. 괴한들은 총격전이 벌어지는 상황에서도 정확하게 정 상무가 머물고 있던 숙소에 들이닥쳤던 것으로 확인됐다.
이에 따라 발전소 건설 현장에 있던 나이지리아 근로자들과 무장단체가 공모했을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정 상무는 올 1월 피랍사건 당시 대우건설 서울 본사에 마련된 대책본부에 상주하며 직원들의 석방 협상을 지원했던 인물. 이번에는 본인이 납치를 당했다.
안 전문위원은 2005년 2월 대우건설에서 퇴사한 뒤 작년 3월 상무급인 해외 전문직 위원으로 재입사했다. 2003년 1월부터 나이지리아에서 근무한 해외통이다.
하 부장은 현장소장을 맡고 있으며 2000년 9월부터 나이지리아에서 일했다. 각종 건설 관련 자격증을 갖고 있는 엔지니어로 현장의 사업 관리를 맡아 왔다.
○ 석방 협상은 어떻게?
외교부와 대우건설은 대책반을 꾸려 인질들을 귀환시키기 위한 노력을 다각도로 벌이고 있다. 이미 2번이나 납치사건을 겪어 협상 경험이 쌓인 데다 괴한들의 목적이 인질 살상보다는 ‘몸값’에 있는 때가 많아 채널을 총동원해 무장단체의 행방과 요구사항을 파악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올해 1월 나이지리아 오구 지역에서 무장단체에 납치됐던 홍종택(42) 대우건설 차장은 “당시 무장단체 조직원들은 ‘당신들은 안전하다. 해치지 않겠다’고 먼저 말했고, 인질을 괴롭히기보다는 협상 과정에서 이용하는 정도였다”고 전했다.
또 납치된 하 부장도 전화로 “우리는 무사하다”고 말한 만큼 아직까지는 생명의 위협은 크지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
대책반은 이 지역 최대 무장단체인 ‘니제르델타 해방운동(MEND)’을 통해 괴한들의 신원 파악에 나섰고, 자체 정보망을 이용해 피랍 임직원들의 안전 여부를 확인 중이다.
특히 피랍된 나이지리아인 운전사가 먼저 석방돼 현장에 귀환했기 때문에 무장단체와의 협상에 탄력이 붙을 것으로 보인다.
이홍재 대우건설 상무는 “나이지리아에서 오래 일했기 때문에 무장단체와의 커넥션(연락선)도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국가 보호시설인 발전소 공사 현장이 습격당한 데다 군인까지 사망했다는 점에서 협상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고기정 기자 koh@donga.com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석유 개발 이익 싸고 부족간 갈등
올 외국인 93명 납치… 이달만 18명
나이지리아에서 외국인을 노린 테러와 납치가 빈발하는 것은 무엇보다 정정(政情) 불안에 따른 치안 부재(不在) 때문이다.
1960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뒤 민족과 종교가 다른 150여 부족이 석유와 가스전 개발을 통한 이익 배분을 놓고 갈등을 빚고 있어 소모적 유혈사태가 끊이지 않는다. 또 천연자원이 풍부하고 인구가 많은 남부와 권력을 쥐고 있는 북부의 알력도 심하다. 이 때문에 지역별로 군벌화된 대형 무장단체는 물론 수십 명 규모의 갱단까지 난립해 있다. 특히 올해(4월 21일)처럼 4년마다 실시하는 대통령선거가 있는 해에는 정권교체와 분리 독립을 주장하는 세력들이 정부에 대한 협상수단이나 조직 유지비 조달을 위한 통로로 외국인 납치를 이용하고 있다. 더욱이 대우건설이 진출해 있는 니제르 강 삼각주 지역은 최대 무장단체로 꼽히는 ‘니제르델타 해방운동(MEND)’의 본거지인 데다 남부 독립운동의 거점이어서 무정부 지대나 다름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3일 AP통신에 따르면 5월 들어서만 이번에 피랍된 한국인을 포함해 18명이 이 지역에서 납치됐다. 이에 따라 니제르 강 삼각주 지역에서 올해 들어 피랍된 외국인은 최소한 93명으로 작년 한 해 동안 납치된 전체 외국인(80여 명) 규모를 이미 넘어섰다.
고기정 기자 ko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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