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 난민캠프로 가는 길은 멀고 험했다. 인천공항을 출발해 태국 방콕을 거쳐 19시간을 날아 온 끝에 에티오피아 수도 아디스아바바에 도착했다. 다시 국내선 비행기로 2시간, 버스로 1시간 넘게 달린 뒤에야 지지가 케브리베야 난민캠프는 모습을 드러냈다.
멀리서 본 캠프는 평화로웠다. 광활한 초원의 햇살 아래 소와 말이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었다. 촘촘히 들어선 돔 모양을 한 알록달록한 색깔의 집들도 아름다웠다.
하지만 가까이 갈수록 현실은 달랐다. 여기저기 널린 쓰레기의 악취가 코를 찔렀다. 집이라곤 나무기둥을 세우고 비닐과 이불조각으로 지붕을 얽어 만든 움막이 전부였다.
16일 낮 캠프의 UNHCR 사무소 밖에는 수십 명이 초조하게 줄지어 서 있었다. 난민 지위 인정을 위한 예비 면접을 기다리는 사람들이다.
2월 고향인 소말리아 수도 모가디슈를 떠나온 압디 아마드 알리(51) 씨는 면접관들 앞에서 “살려 달라”고 호소했다. 그는 “박격포 공격으로 옆집이 산산이 부서지고 사람들이 모두 죽었다. 살기 위해 무작정 국경을 넘었다”고 말했다.
배급카드를 손에 넣은 알리 모하마드 키에로(62) 씨의 눈가엔 눈물이 맺혔다. 난민 지위를 인정받아 배급카드를 받으면 비누, 담요, 조리기구 등 생필품과 식량을 지급받는다. 그는 “더는 구걸하지 않아도 돼 다행”이라며 ‘생명줄’이나 다름없는 배급카드를 자랑스럽게 내밀었다.
○ 난민캠프 16년, 끝나지 않는 망향가
하지만 난민캠프에 정착하더라도 삶은 어렵기만 하다. 영양실조 상태의 9개월 된 아들을 안고 보건소를 찾은 힌다 바시르 유스프(42) 씨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나뭇가지에 체중계를 걸고 아들의 몸무게를 달아 보니 4.8kg. 정상 체중의 절반에 불과하다. 다리는 새 다리처럼 가늘었다. 힘이 없어 얼굴에 파리가 앉아도 쫓지 못하고 울기만 했다.
병실로 쓰고 있는 집으로 들어서자 고름 냄새가 진동하고 파리 떼가 가득했다. 영양실조, 설사, 파상풍에 걸린 아이들이 입원해 있었지만 링거 한 병을 맞는 것이 전부여서 치료라고 할 수도 없었다. 의사도 1명뿐이고 의약품은 턱없이 부족하다. 제대로 치료받지 못해 매달 평균 5명의 아이들이 목숨을 잃고 있다고 캠프 관계자는 말했다.
○ 희망, 아직은 낯선 단어
캠프 멀리에서는 간간이 폭발음이 들렸다. 지역담당관은 기자에게 저녁에 혼자 다니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기자가 검은색의 카메라로 사진을 찍으려 하자 총으로 오인한 아이들이 혼비백산해 달아날 만큼 공포가 일상화되어 있다.
질병과 배고픔의 고통이 난민캠프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다. 어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아이들이 꿈을 잃게 되지나 않을까 하는 것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가슴에서 뜨거운 것이 울컥 치밀어 올랐다.
난민학교가 두 군데 있지만 글을 깨치게 하는 수준이다. 그나마도 학교에 다닐 연령의 어린이 6412명 가운데 등교할 수 있는 아이는 31.8%에 불과하다.
학교에 가 보니 교과서와 공책만 갖춘 30여 명의 아이가 어깨가 닿을 정도로 빽빽이 앉아 있다. 학교 급식은 꿈도 못 꿔 굶는 아이들이 주린 배를 움켜쥐고 있는 모습도 간혹 눈에 띈다.
그래도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은 행복한 편이다. 학교에 못 가는 아이들은 먼 곳에서 물을 길어 오는 등 집안일을 돕는다. 초등교육을 넘어 중등교육이나 직업교육 과정은 아예 꿈조차 꿀 수 없는 상황이다.
UNHCR 에티오피아 지역사무소의 일룬가 응간두 소장은 “꿈을 잃은 청소년들이 범죄나 테러집단의 유혹에 넘어갈 위험이 있다”며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제대로 된 교육이 필요하다”고 우려했다.
“선생님이 되고 싶다”며 해맑게 웃는 여덟 살 여자 아이의 커다란 눈망울에서 본 한 줄기 희망은 앞으로도 상당 기간 잊혀지지 않을 것만 같다. 하지만 근처 길가에서 벽에 기댄 채 멍하니 하늘을 쳐다보고 서 있는 10대 후반 아이의 허무한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의 희망이 증발하는 것을 막기 위해 뭔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찌는 더위만큼이나 강렬하게 솟았다.
후원=한국언론재단·UNHCR
글·사진 케브리베야=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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