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는 ‘팍스 아시아-퍼시피카’… 지는 ‘팍스 아메리카나’

  • 입력 2007년 6월 5일 03시 03분




《동아시아 국가 간의 급속한 교역 증가와 자유무역협정(FTA) 체결 움직임, 동남아국가연합(ASEAN·아세안)+한중일 정상회의, 동아시아정상회의(EAS), 그리고 영화와 드라마에서 음악에 이르기까지 활발한 문화 교류…. 최근 동아시아의 기류를 보면 공동의 시장과 화폐를 갖는 유럽연합(EU) 같은 지역공동체로 성장하리라는 기대를 가질 만하다. 그러나 이 같은 통합 움직임 속에 미국은 보이지 않는다. 동아시아에서 ‘팍스 아메리카나’는 가고 ‘팍스 아시아-퍼시피카’(아시아태평양 국가 주도의 평화)가 오는 것인가. 미국의 중도적 외교안보 싱크탱크인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가 발행하는 외교전문지 ‘워싱턴 쿼털리’ 여름호가 동아시아의 지역통합과 미국의 딜레마를 다룬 2개의 논문을 나란히 실었다. 둘 다 ‘국외자 미국’이 취해야 할 새로운 동아시아 전략이 초점이다.》

▼‘중국 우산’ 속으로▼

中, 무력 대신 협력 강조해 믿음 얻어… 분쟁 중재도

2003년 겨울, 캄보디아 수도 프놈펜의 태국대사관 앞에서는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고 태국 기업들은 공격을 받았다. 태국의 TV 스타가 캄보디아인을 ‘벌레’라고 부르며 앙코르와트 유적이 태국 것이라고 말했다고 언론이 잘못 보도한 직후였다.

중재자로 나선 것은 중국이었다. 두 나라의 요청을 받은 중국은 비공식적으로 왕이(王毅) 당시 외교부 부부장을 내세워 분쟁 해결 방안을 찾도록 도왔다.

10년 전이라면 분쟁의 중재자 역할은 당연히 미국의 몫이었을 것이라고 조슈아 컬랜칙 카네기재단 초빙연구원은 지적했다. 그는 동아시아는 이제 역외 국가(미국)가 아닌 역내 국가(중국)가 지역 분쟁 조정에 나서는 지역통합체로 발전 중이라고 강조했다.

동아시아의 자체적인 기구와 제도를 만들고 역내 자유무역을 발전시키며 2005년부터 매년 개최되는 EAS도 최초의 진정한 역내 정상회담으로 자리 잡았다는 것.

이 같은 지역통합의 시발점은 1990년대 말 외환위기였다. 미국은 긴급구제금융 지원을 거부했고 이 때문에 많은 국가가 미국에 배신감을 갖기 시작했다. 반면 중국은 환율 방어의 필요성에도 불구하고 위안화를 평가절하하지 않았다.

상징적 조치였지만 이를 계기로 중국은 주변국의 신뢰를 얻었다. 나아가 중국은 남중국해 영토분쟁에 무력을 과시하던 과거의 공세적 태도에서 벗어나 동아시아의 협력을 강조하며 아시아 통합의 열렬한 주창자로 나섰다.

컬랜칙 연구원은 가장 큰 취약점인 동아시아 안보협력에 대해서도 피델 라모스 전 필리핀 대통령의 발언을 인용해 낙관적 전망을 내놓았다.

라모스 전 대통령은 2004년 “조만간 아시아 안보협조 체제가 미국의 안보우산 체제를 대체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과거 미국 중심의 양자동맹 체제가 19세기 초 나폴레옹전쟁 이후 유럽협조 체제(Concert of Europe) 같은 안보협력 체제로 발전할 것이라는 전망이다.

▼“일본-인도 키우자”▼

美 “中 헤게모니 막아라” 적극 지원… 다극체제 유도

미국이 냉전시대부터 유지해온 동아시아 지역안보의 두 축은 부챗살 같은 양자 군사동맹 체제와 군사력의 전진 배치였다.

대니얼 트위닝 옥스퍼드대 교수는 여기에 더해 미국이 세 번째 안보전략으로 우호적 국가들의 부상을 지원해 새로운 힘의 중심을 만들어 가는 ‘그랜드 디자인’을 가동 중이라고 지적했다. 그 목적은 급부상하는 중국의 헤게모니 장악을 견제하는 것이다.

동아시아에 ‘다원적 안보질서’를 만들기 위해 미국이 최우선으로 지원하는 국가는 바로 일본과 인도다. 미국은 지난 10여 년간 일본을 ‘동방의 영국’으로 대접하며 세계적인 안보 파트너로 성장시켜 왔다. 평화헌법 9조의 수정을 촉구하면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지위 획득을 약속했고 미사일방어(MD) 체제 개발의 파트너로 만들었다.

인도 역시 새로운 강국으로 부상하도록 적극 후원해 왔다. 특히 핵 협력을 통해 인도의 국제 위상을 강화하면서 향후 국제정치의 흐름을 좌우할 국가로 성장하도록 돕고 있다.

미국은 인도네시아, 베트남과도 다양한 군사교류를 확대하고 있다. 두 국가와 공식적 동맹관계를 가질 수는 없겠지만 중국에 편승하지 않는 독자성을 키워 중국의 지배를 막겠다는 것이다.

나아가 미국은 ‘아태지역 민주국가 협조체제’라는 더 큰 그림도 그려 가고 있다고 트위닝 교수는 설명했다.

하지만 이런 그랜드 디자인은 당장 중국의 반발을 사고 있다. 이에 맞서 중국은 주변국들이 미국 주도의 중국 봉쇄 연합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주변국 관계를 강화하는 ‘비스마르크 식 정책’을 펴고 있다고 트위닝 교수는 진단했다.

그는 “중국의 부상에 따라 아시아에서 상대적으로 미국의 힘이 줄어드는 것은 불가피하며 공개적인 중국 봉쇄도 불가능하다”며 따라서 미국으로선 어느 한 국가가 동아시아를 지배하지 않는 ‘비대칭적 다극 체제’를 만드는 것이 최선이라고 덧붙였다.

이철희 기자 klim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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