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보수우파 이데올로기는 이제 저물어 가는 분위기다. 그 원인이 무엇일까. 영국 파이낸셜타임스의 칼럼니스트 기드온 래치먼 씨가 계간 국제문제전문지 ‘워싱턴 쿼털리’에서 나름의 답을 내놓았다.
래치먼 씨는 먼저 우파의 퇴조 원인을 지구온난화와 이라크전쟁에 대한 우파의 잘못된 선택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특히 지구온난화는 우파가 그토록 신봉해 온 시장경제의 실패가 원인이었다. 그 해법도 대부분 우파가 혐오하는 내용이다. 교토의정서라는 괴물 같은 국제협약, 배출가스에 매기는 높은 세금, 세계화에 반하는 지역주의 대두, 고속성장이 문제라는 인식까지….
또한 이라크전쟁은 우파의 지적 도덕적 자부심마저 여지없이 무너뜨렸다. 우파는 서구 민주주의의 우월성을 믿고 무한정 수출이 가능하다고 여겼다. 이라크 침공 때 ‘해방자’로 환영받을 것이라는 빗나간 확신도 여기에서 나온 것이었다.
래치먼 씨는 “지구온난화는 히스테리일 뿐이고 이라크는 잘될 것이라고 주장하는 골수 우파도 여전하지만 우파는 이미 정치적 논쟁에서 졌다”고 선언했다. 실제 영국 보수당과 미국 공화당은 두 이슈에 대한 좌파의 주장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이다.
더욱이 앵글로-아메리칸 우파 공동전선에도 균열이 생기고 있다.
영국 우파는 미국에 비해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보수당은 기후변화를 주요 의제로 설정해 기존의 로고를 푸른 나무로 바꿨고 데이비드 캐머런 당수는 미국과 노예적 관계를 가져선 안 된다며 미국 공화당과도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미국 우파도 느리긴 하지만 변하고 있다. 대선주자인 존 매케인 상원의원과 루돌프 줄리아니 전 뉴욕시장이 기후변화에 강력한 대처를 주문한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이라크 정책을 무조건 지지하는 만장일치도 사라졌다.
나아가 미국에선 종교적 우파인 복음주의가 득세하지만 세속적인 영국은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낙태나 줄기세포 연구, 동성 결혼 등은 영국에서 더는 논쟁거리가 안 된다. 따라서 기존 레이건-대처 연합이 다음 세대에 여전히 가동되겠느냐는 의문마저 제기된다.
그러나 래치먼 씨는 “우파가 새로운 현실에 적응할 수 있는 여지는 많다”며 18세기 영국 정치철학자 에드먼드 버크식의 신중하고 실용적인 보수주의, 추상적 주장보다는 구체적인 접근 방식을 해법으로 제시했다.
그러면서 우파는 이제 기후변화의 인재(人災)론과 이라크전쟁의 실패를 인정하고 좌파의 반대세력으로서 자리 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파는 규제 강화와 세금 인상을 밀어붙이는 좌파에 맞서 이산화탄소 배출거래제 등 시장에 기반을 둔 해법을 내놓을 수 있다는 것이다.
외교정책에 있어서도 서구 민주주의를 제3세계에 무력으로 수출하는 것은 우파의 프로젝트가 결코 될 수 없음을 인정하고 조직적 재정적인 지원을 통해서 태동하는 민주국가를 격려하는 정책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나아가 중국, 러시아의 부상에 맞서 유럽-북미 간 ‘대서양 공동체’를 지켜야 한다는 점도 주문했다. 이를 위해 미국은 ‘프랑스 혐오(Franco-phobia) 바이러스’부터 치료해야 하며 유럽도 ‘위험한 미국’이라는 인식을 바꿔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철희 기자 klim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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