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한국과 마찬가지로 사실상 ‘석유 한 방울 나지 않는’ 자원소국(小國)이다.
2004년 원유 수입량이 2억4200만 kL였던 데 비해 국내 생산은 86만 kL로 0.3%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일본이 지금과 같은 고유가 시대에 세계 2위 규모의 경제를 무리 없이 운용할 수 있는 것은 세계 최고 수준의 에너지 절약 기술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에너지기구(IEA)에 따르면 일본은 국내총생산(GDP) 대비 석유와 석탄 등 1차 에너지소비량이 세계에서 가장 적다. 즉 에너지 효율성이 가장 높다는 이야기다.
일본의 에너지 효율은 미국의 2.7배, 한국의 3.3배, 중국이나 인도에 비해서는 무려 9배나 높다.
주일 한국대사관에 근무하는 김경수 상무관은 최근 전자제품 양판점에 냉장고를 사러 갔다가 일본의 에너지 절약 기술이 얼마나 빨리 발전하는지를 실감했다.
그는 “1년 전에 나온 구모델에 비해 에너지 이용효율이 10%나 높은 신모델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면서 “전자제품의 에너지 효율이 1년에 10%나 높아진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라고 말했다.
일본에서 전자제품 에너지 절약기술의 비약적인 발전은 ‘선두주자(Top Runner) 방식’이라는 일본의 독특한 정책에 힘입은 바 크다.
선두주자 방식이란 전기제품의 에너지 절약 및 자동차 연료소비효율 기준을 가장 성능이 뛰어난 제품에 맞춰 설정하는 제도. 일정한 기간에 이 기준을 맞추지 못하는 제조업체나 수입업체는 정부의 행정지도를 받거나 벌금을 물게 된다.
일본은 1998년 에너지 절약법을 개정해 냉장고와 에어컨 등 21개 품목을 대상으로 이 제도를 도입했다.
선두주자 방식을 실시한 결과 2004년 에너지 효율은 1997년에 비해 60%나 높아졌다.
그런데도 일본 정부는 에너지 효율을 더 높이기 위한 새로운 정책을 줄줄이 내놓고 있다.
앞으로 소비자들이 에어컨과 냉장고를 에너지 절감 효과가 높은 새 제품으로 교체하면 금융기관이 저금리로 돈을 빌려 주기로 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다.
지난해 5월 발표한 ‘신 국가 에너지 전략’에서도 에너지 절약 가속화는 원자력 입국 등과 더불어 에너지 전략의 뼈대를 이룬다.
구체적인 수치를 보면 일본 정부는 1973∼2003년 37%가량 높아진 GDP 대비 에너지 효율을 2030년까지 추가로 30% 끌어올리기로 했다.
일본은 세계적인 에너지 절약기술을 산유국에서 에너지를 안정적으로 공급받기 위한 ‘외교 카드’로도 활용하고 있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는 1월 필리핀에서 열린 동아시아정상회의에서 “자원보유국으로부터 5년간 1000여 명의 연수생을 받아들여 에너지 절약 기술을 제공하겠다”고 선언했다. 여기에는 연수생을 보내는 자원보유국으로부터 반대급부로 에너지 안정 공급 약속을 이끌어 낸다는 일본 정부의 복안이 깔려 있다.
도쿄=천광암 특파원 ia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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