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계 ‘금융황제’ 기 드 로스차일드 사망

  • 입력 2007년 6월 16일 03시 01분


250년간 국제금융계를 주름잡아 온 유대인 재벌 로스차일드 가문에서 ‘살아 있는 전설’로 불렸던 기 드 로스차일드(사진)가 12일 프랑스 파리에서 사망했다. 향년 98세.

뉴욕타임스는 14일 로스차일드 가문이 그의 사망을 공식 발표했다고 전했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18세기 유대인 대금업자인 메이어 암셸 로스차일드가 로스차일드 은행을 창설하면서 세계 금융계에 등장했다. 암셸은 파리, 영국 런던, 이탈리아 나폴리, 오스트리아 빈 등에 지점을 만들고 다섯 아들에게 나누어 맡겼다. 이들은 나폴레옹 전쟁과 유럽의 철도 건설 붐을 활용해 각국 왕실의 금고 역할을 하면서 세계사에 영향을 미치는 배후세력으로 성장했다. 유럽이 혁명과 전쟁의 격변을 지나는 시기에 각국의 주요 정보를 공유한 로스차일드의 선진 금융기법은 막대한 부를 쌓을 수 있는 바탕이었다.

기 드 로스차일드는 암셸의 아들 중 프랑스 지부를 맡았던 제임스의 증손자. 그에게 위기가 닥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때 프랑스가 독일에 점령돼 나치 괴뢰 정권인 비시 정부가 은행을 빼앗으면서부터였다. 아버지와 함께 미국 뉴욕으로 떠났던 그는 1944년 파리로 돌아와 가업 재건에 나섰다. 특히 그가 고용했던 조르주 퐁피두가 뒤에 대통령이 되면서 프랑스 정부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는 로스차일드 은행을 인수합병 전문 투자은행으로 키우고 와인 제조 및 경주마 육성에도 손을 댔다. 프랑스 보르도 지방에서 생산되는 ‘샤토 무통 로칠드’는 그가 와인 제조업에 진출한 덕분에 태어난 와인.

1979년 은행 회장 직에서 은퇴한 그는 1981년 사회당의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이 집권하면서 그의 은행을 국영기업으로 바꾸자 또다시 미국으로 떠났다. 당시 그는 “페탱(비시 정부의 지도자) 아래에선 유대인, 미테랑 아래에선 최하층민”이라며 “더는 이렇게 살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그러나 프랑스 내에서 로스차일드의 영향력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그의 큰아들 다비드와 사촌 에릭은 1984년 사회당 정부로부터 새로운 은행 설립 허가를 받았다. 단 로스차일드 이름을 쓰지 않는다는 조건 때문에 ‘파리 오를레앙 은행’이라는 이름을 내걸었다.

김영식 기자 spea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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