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일 낮 12시 40분경(현지 시간) 아프가니스탄 가즈니 시 국제적십자사의 현지 단체인 적신월사 앞. 멀리서 붉은 십자가 표시가 선명한 흰색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이 다가오자 한국 정부 대표단과 적신월사 관계자 및 보도진 사이에서 가벼운 환호가 일었다.
이 차량에는 아프간 전통 의상과 울긋불긋한 히잡을 머리에 두른 안혜진, 이정란, 한지영 씨 등 여성 3명이 타고 있었다. 이어 3시간여가 지난 뒤에는 고세훈 씨 등 5명이 석방되고 또 3시간여가 지난 뒤에는 인질 중 최고령이었던 유경식 씨 등 4명이 잇따라 풀려났다.
석방 합의가 발표됐지만 우여곡절도 많아 인질을 넘겨받기 전에는 모두들 안심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합의 하루 만에 12명이 몇 시간 지나 풀려났다. 나머지 7명도 곧 풀려날 것이라는 기대가 높아졌다.
○신속한 석방 진행
28일 석방 합의 발표 이후 실제로 인질이 풀려나는 데 며칠이 걸릴 것이라는 보도가 나와 석방에 시간이 걸릴 것이라는 관측도 있었다. 하지만 29일 처음 3명이 풀려난 후 6시간여 만에 9명이 추가로 석방돼 41일 만에 악몽 같은 억류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11일 몸이 아픈 여성 2명을 석방하겠다고 발표한 뒤 이틀이 지나서야 김경자, 김지나 씨를 석방한 것과 비교하면 예상보다 훨씬 신속한 석방이다.
29일 처음 풀려난 3명의 여성은 적신월사 관계자가 가즈니 시에서 동남쪽으로 2km가량 떨어진 카라이카지 지역에서 넘겨받았다.
이날 석방된 인질들을 탈레반 측에서 넘겨받아 적신월사에 인계해 준 아프간 부족 인사 하지 자히르 씨는 13일에도 김경자, 김지나 씨를 인계했던 사람이다.
그가 탈레반으로부터 어디에서 인질들을 넘겨받았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한편 이날 탈레반 협상 대표단의 물라 나스룰라는 아프간 정부가 한국 인질에 무관심했다고 말해 눈길을 끌었다.
그는 인질 석방 전 연합뉴스와 한 간접 통화에서 “한국인 인질에 대한 아프간 정부의 관심은 이탈리아 독일 등 대규모 병력을 보내고 지원도 많이 하는 국가에 비해 크게 부족하다”면서 “우리가 한국인 인질 몇 명을 방패막이로 붙잡고 있더라도 아프간 정부가 우리를 공격하지 못할 것으로 보고 있지는 않다”고 말했다.
○“지치고 피곤하지만 기쁩니다”
탈레반에서 풀려나 적신월사 차량을 타고 잇달아 도착한 인질들은 오랜 억류 생활로 지쳐 보였다. 왼쪽 가슴에 태극기가 달린 붉은 조끼를 입은 고세훈 씨는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르고 있어 그동안 면도를 자주 하지 못한 것으로 보였다.
여성들은 대부분 히잡으로 얼굴을 모두 가리고 있어 표정을 볼 수 없었다. 하지만 적신월사 관계자들은 인질들이 모두 건강해 보인다고 말했다.
자히르 씨는 “처음 풀려난 3명의 여성은 13일 풀려난 김경자 씨 등 여성 2명처럼 통곡하지는 않았지만 흐느끼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한 여성은 자히르 씨의 전화기를 빌려 (한국에 있는) 부모와 통화를 했다고 AFP통신이 전했다.
자히르 씨의 차를 타고 이동하던 중 한 여성은 현지 통신 아프간이슬라믹프레스(AIP)와의 통화에서 “매우 지쳐 있지만 괜찮다”고 말했다. 또 AFP와의 통화에서는 한 여성이 다리어로 “너무너무 기쁘다”고 말했다고 이 통신이 전했다.
여성들은 적신월사 차량을 타고 가즈니 시에 도착한 후에는 기다리고 있는 취재진의 질문에 일절 대답하지 않고 미군기지 내 지방재건팀(PRT)으로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