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이제 어디 안 간다고 약속해 ”

  • 입력 2007년 9월 3일 03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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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려 끼쳐 죄송합니다”아프가니스탄에서 납치됐다가 풀려난 19명이 2일 오전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입국했다. 입국 직후 공항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피랍자 대표인 유경식 씨(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가 “국민에게 심려를 끼쳐 죄송하다”고 말하고 있다. 인천=김재명  기자
“심려 끼쳐 죄송합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납치됐다가 풀려난 19명이 2일 오전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입국했다. 입국 직후 공항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피랍자 대표인 유경식 씨(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가 “국민에게 심려를 끼쳐 죄송하다”고 말하고 있다. 인천=김재명 기자
탈레반 무장세력에 납치됐다 풀려난 김윤영 씨가 2일 귀국 직후 경기 안양시 샘안양병원에서 두 자녀를 품에 안고 생환을 기뻐하고 있다. 안양=김미옥 기자
탈레반 무장세력에 납치됐다 풀려난 김윤영 씨가 2일 귀국 직후 경기 안양시 샘안양병원에서 두 자녀를 품에 안고 생환을 기뻐하고 있다. 안양=김미옥 기자
가족들과 눈물의 재회… 흐느끼다 실신하기도

비행기안선 신문 탐독… 국내 반응 걱정 역력

일부 “탈레반 개종 강요하며 구타 - 살해 위협”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무장세력에서 풀려나 지난달 31일(현지 시간) 카불을 출발해 두바이에 도착한 피랍자 19명.

두바이 시내 ‘두지트 두바이호텔’에서 밤을 보낸 이들은 1일 오후 4시경 300여 명의 일반 승객이 모두 비행기에 오른 뒤 마지막으로 인천행 대한항공 KE952편에 몸을 실었다.

○ 피랍자들, 비행기 안에서 신문 탐독

2층 비즈니스클래스에 들어서자마자 이들이 가장 먼저 찾은 것은 신문이었다.

고세훈(27) 씨 등 피랍자 대부분은 기내에 마련된 국내 신문들을 자리로 가져가 꼼짝도 않고 오랫동안 탐독했다. 피랍 사태에 대한 국내 반응을 걱정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오후 5시 10분경 비행기가 이륙한 뒤 1시간쯤 지나 피랍자들을 인솔한 박인국(외교통상부 다자외교실장) 정부현지 대책본부장이 취재진에게 3분간 피랍자들의 ‘모습’을 공개했다. 말을 걸지 않는다는 조건이었다.

차혜진(31), 김윤영(35) 씨 등 여성 피랍자들은 충혈된 눈에 수시로 눈물을 글썽였다. 또 안혜진(31) 씨는 불안한 듯 시선을 고정하지 못했다.

일행 중 가장 연장자인 남성 피랍자 유경식(55) 씨는 멍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송병우(33), 고세훈(27) 씨 등 다른 남성 피랍자들은 대부분 좌석을 젖힌 채 잠에 빠져 있었다.

초췌한 얼굴에 턱수염이 수북한 이들에게서 51일 전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출국하며 기념 촬영을 했던 때의 밝은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비행기는 2일 오전 6시 35분경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이날 입국장에는 이들을 격려하기 위해 나온 기독교 신자들이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한 시민은 “세금을 낭비했다”며 피랍자들에게 달걀을 던지려다 경찰에 붙잡히기도 했다.

○ 가족과 눈물의 상봉

이어 피랍자들은 샘물교회 박상은 장로가 의료원장으로 있는 경기 안양시 만안구 샘안양병원이 제공한 소형버스로 병원으로 이동했다.

오전 8시 반경 피랍자들은 이 병원 지하 샘누리홀에서 가족들과 마침내 만났다. 꿈에도 그리던 피붙이들의 얼굴을 보는 순간 가족들과 피랍자들은 눈물을 쏟아냈다.

지난달 13일 풀려난 김경자, 김지나 씨에게 석방 기회를 양보했던 이지영(36) 씨는 울기만 하는 어머니 남상순(66) 씨의 눈물을 닦아 주며 “괜찮아. 엄마. 이제 괜찮아”라는 말을 반복하며 자신도 눈물을 흘렸다.

먼저 풀려나 국군수도병원에 입원 중이던 두 김 씨도 상봉장을 찾아 자신들에게 석방을 양보한 이 씨를 끌어안고 흐느껴 보는 이의 마음을 뭉클하게 했다.

김윤영(35) 씨의 8세 된 딸과 6세 된 아들은 오랜만에 만난 엄마 품에서 한껏 어리광을 피웠다. 초등학교 2학년인 딸은 “엄마 이제 어디 안 간다고 약속해”라며 새끼손가락을 건 채 풀지 않았다.

김 씨의 남편 류행식(36) 씨는 “오늘 만나 보니 정말 살아왔구나 싶다. 애들 엄마도 ‘아이들 때문에 참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서명화(29) 경석(27) 씨의 아버지 서정배(57) 씨는 환한 미소로 남매를 반겼다.

서 씨는 “40여 일 동안 너희들 생각만 했는데 기다린 보람이 있다”면서 환하게 웃었다. 앙상하게 야윈 경석 씨는 눈물을 흘리는 어머니의 등을 토닥이며 오히려 어머니를 달랬다.

대부분의 피랍자는 오랜 긴장감이 한꺼번에 풀어지면서 피로가 몰려온 듯 가족들과 제대로 대화하지 못했다. 서로 껴안고 울먹이거나 가족들의 질문에 짧게 대답하는 데 그쳤다. 한 여성 피랍자는 가족을 만나 흐느끼다가 정신을 잃기도 했다.

한편 숨진 배형규 목사의 형 신규(45) 씨도 이날 샘안양병원을 찾았지만 가족들이 만나는 자리에는 들어가지 않은 채 먼발치에서 이들의 만남을 지켜보기만 했다.

○ 탈레반, 피랍자에게 개종 강요하며 폭력

이들은 앞으로 샘안양병원 3층 ‘전인 치유병동’에서 종합검진과 치료를 받을 예정이다. 전인 치유병동은 신체적인 질병은 물론 정신적인 상태까지 함께 치료받을 수 있는 곳. 피랍자들은 외부와 통제된 채 이곳에서 최소 2주간 치료를 받을 예정이다.

한편 일부 피랍자는 의료진에게 “탈레반으로부터 ‘개종’을 강요당했고 이 과정에서 구타와 함께 심각한 살해 위협을 받았다”고 말했다. 샘안양병원 관계자는 또 “피랍자들이 자는 곳에 탈레반이 들어오려 한 적이 몇 번 있었던 것 같다”며 “(성폭행) 위협으로 보이진 않았으나 남성 인질들이 이를 제지했다고 들었다”고 덧붙였다.

한편 샘물교회 측은 정부의 ‘구상권’ 청구 등을 고려해 대책을 마련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교회 관계자는 “항공료, 시신 운구비 등을 부담한다는 당초 방침에 변화가 없다”며 말을 아꼈다.

두바이=나성엽 기자 cpu@donga.com

안양=이성호 기자 starsky@donga.com

인천=홍수영 기자 gae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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