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스, ‘대권 주자’ 부각 주문”

  • 입력 2007년 9월 4일 04시 1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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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인여성으로 사상 처음 미국 국무장관에 오른 국제정치학자, '테러와의 전쟁' 시대를 맞아 현실주의와 이상주의를 조화한 외교정책수행, 2008년 대선에서 민주당 힐러리 클린턴 상원의원의 '여성 맞수'가 될 수 있다는 기대감….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처럼 국제 언론의 우호적 대우를 받은 장관도 많지 않다. 그러나 그를 지난 3년간 국무부와 세계 외교현장에서 밀착 취재한 워싱턴포스트의 글렌 케슬러 외교전문 기자의 평가는 매서웠다.

그는 4일 출간되는 저서 '측근(Confidante)'을 통해 조지 W 부시 대통령과 가까운 관계가 라이스 장관에게 큰 자산이자, 치명적 약점이었다고 평가했다. 그는 "라이스 장관의 성적은 과거(1기 행정부에서 이라크전쟁 개전과정에서) 저지른 실수를 제한적으로 만회하는 정도"라고 혹평했다.

1996년 워싱턴포스트가 실시한 여론조사는 기자에게 '라이스 제대로 보기'의 필요성을 더한 것 같다. 당시 조사는 수렁에 빠진 이라크전쟁의 책임을 라이스 장관이 얼마나 져야 하는지를 물었다. 그러나 응답자의 50%이상이 책임이 거의 또는 전혀 없다고 답했다.

▽라이스의 근접보좌 노력=1기 행정부 4년간 대통령 안보보좌관으로 부시의 외교 가정교사를 지낸 라이스는 부시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한 2004년 11월 친정인 스탠퍼드대 교수로 복귀를 결심했다. 그러나 선거승리 이틀이 지난 시점 부시 대통령과 메릴랜드 주 별장인 캠프데이비드에 마주 앉아 본인에게 통보도 안 된 '콜린 파월 국무장관 교체' 결심을 들려줬다. 사실상 라이스에게 자리를 권한 셈이었다.

라이스는 "대통령께서 2기 외교안보팀을 새로 짜셔야지요"라며 일단 고사했다. 그러나 대통령은 "그러게 지금 제안하지 않느냐"며 물러서지 않았다.

라이스의 고민은 하나였다. 과연 백악관을 떠나 1km 떨어진 국무부로 옮기더라도 부시와의 끈끈함을 유지할 수 있을지…. 라이스는 그 자리에서는 "제가 대통령을 하루에 8번씩 뵙잖아요. 국무부로 간다 하더라도 그 끈(connection)을 놓치고 싶지 않습니다"라고 답했다.

부시 대통령은 그로부터 사흘간 2시간 이상에 걸쳐 국무장관직 이야기를 꺼냈다. 결국 라이스는 수락했고, 1주 뒤 정식 발표됐다.

백악관의 라이스는 그야말로 부시의 가정교사였다. 수많은 외국정상의 면담자리를 앞두고 부시 대통령은 "왜 (그 사람들을) 만나야 하느냐"를 물으면 그 이유를 설명했고, 대통령이 정상회담을 앞두고 '비 외교적 발언'을 꺼내도 좋으냐고 물으면, "그런 말은 이래서 안 된다"는 식으로 걸러내는 역할을 했다. 부시 대통령은 "미스 라이스가 별걸 다 못하게 한다"고 했지만, "미스 라이스는 내 여동생 같다"고 말할 정도의 애정을 표시했다. 유엔무대에서 만난 미국 외교관에게 "라이스의 말은 내 생각으로 받아들여도 좋다"고 했다.

문제는 폐쇄성에 있었다. 주변에선 이런 상황을 '부시-라이스 블랙박스'라고 불렀다. 라이스 장관이 백악관 집무실에서 대통령을 만나고 나오면 '대통령의 결심'이 아래에 전달됐다. 그러나 주변에선 과연 그 결심이 대통령의 구상인지, 라이스의 조언이었는지 알 길이 없었다.

▽만들어진 이미지=라이스 장관이 구축한 우호적 이미지는 '정교한 홍보작품'이란 지적도 제기됐다. 취임을 앞둔 2005년 초 그는 워싱턴 시내의 자택인 워터게이트 아파트로 참모들을 소집해 이라크전쟁으로 구겨진 미국의 이미지회복 전략을 짰다. 그때의 결론은 국무장관이 발 빠르게 움직이는 모습을 전 세계에 보여줘야 한다는 것으로 모아졌다. 국무부 역사분석가는 "대통령과의 지근거리 유지"를 성공비결로 꼽았다.

그래서 고용된 것이 홍보전문가 짐 윌킨슨이었다. '촌각을 아낀다(No wasted moment)'라는 구호 아래 첫 100일간 만날 외교상대국과 동행대상이 구상됐다.

출발은 라이스장관을 궁지에 몰아넣을 비판적 질문을 뽑아내고, 효과적으로 답변하는 길을 찾았다. 라이스는 국무부 직업외교관을 경멸했다? 백악관 안보보좌관 역할은 실패였다? 네오콘 도당의 일부 아니었나? 라이스는 인간미가 부족하다?

'차갑다'는 이미지 불식을 위해 전임자와 다른 전략이 동원됐다.

라이스 장관이 혼자 등장하는 사진은 이후론 공개하지 않았다. 취임식 때 국무부로비에 선 그의 뒤편에 직원들이 '배치'됐다. 콜린 파월 전임 국무장관이 국무부 정문에서 차가운 유리창을 배경으로 외국 장관을 만났다면, 라이스는 건물 맨 위층의 고급스런 접견실에서 벽난로가 배경으로 사용됐다.

첫 해외방문지로 고른 유럽에서는 프랑스에서 파리 음악원을 들렀다. 대만출신 첼리스트 요요마와 협연했던 피아노 솜씨를 발휘할 기회를 자연스럽게 만들었다. 독일 내 미군 기지를 방문할 때엔 긴 검은 부츠, 무릎 위로 올라온 검은 치마, 금색 단추가 달린 검은 코트가 '코디'됐다. 그는 50을 갓 넘긴 나이였지만, 미혼에 신장이 174cm인 라이스 장관은 개인트레이너를 고용해 운동할 정도로 건강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런 날이면 라이스장관이 중요한 이란정책 발표보다는 언론은 그의 옷맵시에 더 관심이 모아졌다.

2005년3월에 워싱턴타임스 간부와 인터뷰하는 자리에선 고도로 계산된 질문을 해 달라는 쪽지가 건네졌다는 증언도 나왔다. 쪽지에는 취임 6주밖에 안 된 장관에게 "2008년 출마여부를 물어달라"고 적혀 있었다. 그날 실제로 같은 질문이 던져졌고, 라이스 장관은 "출마여부 생각 안 해 봤다"는 모범답안을 내놓았다. 그러나 그 이후 언론은 '2008년 힐러리 대 라이스'라는 제목을 뽑았다. (단, 당시 인터뷰 기자와 참모들은 이런 일화를 두고 '기억 없다'는 반응했다.)

▽콘디의 변신=부시 행정부에 참여한 라이스에게 큰 변화라면 현실주의자 소장학자의 대표격이던 그가 도덕주의 외교론자로 변해갔다는 점이다. 미국의 국익을 위해서라면 '불량 국가'를 바꾸려 들지 않고 있는 그대로 상대한다는 것이 현실주의다. 라이스는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80년대 "소련은 악의 제국(Evil Empire)"라고 공개 발언한 것에 동의하지 않았었다.

라이스의 과거이력을 아는 주위 인사들은 '우리가 못 보던 라이스의 뭔가를 부시 대통령이 끄집어 냈다'고 입을 모았다. 일부는 그의 목사의 딸인 그가 가진 기독교 신앙이 이유라고 진단했고, 일부는 앨라배마 주 버밍햄 시절 겪었던 인종차별이 가져온 인권제약에 대한 혐오를 그 이유로 꼽았다.

현실주의를 버린 라이스는 이후 입버릇처럼 "외교란 주고받기 식 거래를 체결해 내는 것 이상의 뭔가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부하직원들에게 "외교관으로 성공하려면 네가 처한 상황을 전략적으로 보라. 성급히 거래해선 안 된다. 기다리고, 우호적 상황이 다가오면 행동에 옮기라"고 했다.

2005년 5월 라이스 장관이 이라크를 찾았다. 국무장관 취임 후 처음 바그다드에 온 그는 큰 강(티그리스 강), 비옥한 토지, 찬란한 역사를 반영하는 유적지가 이라크에 존재함을 이야기했다. 게다가 풍부한 유전, 교육수준 높은 국민을 떠올렸다. 그리고는 즉흥적으로 백악관으로 전화를 걸었다. 수화기 반대편의 부시 대통령에게 "각하. 이라크는 위대한 나라가 될 겁니다"라고 했다.

워싱턴=김승련특파원 sr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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