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에 앞서 독일 16개 주정부는 2005년 KEF가 월 1.90유로(약 2500원)의 수신료 인상이 필요하다고 건의한 데 대해 인상분이 과도하다며 월 0.88유로(약 1140원)만 인상하도록 결정한 바 있다. 이에 방송사들이 헌법소원을 제기했고 헌법재판소가 이를 받아들인 것.
연방헌법재판소의 이번 결정은 ‘KEF는 독립적인 기관이므로 이 기관의 결정에 주정부의 영향력이 개입될 경우 언론 자유가 침해될 수 있다’는 취지에 따른 것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독일 언론은 이 결정에 대해 “공영방송의 현실을 고려하지 않은 형식논리적 결정”이라며 맹렬히 비판했다.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FAZ), 쥐트 도이체 차이퉁(SZ) 등 주요 독일 언론은 이날 헌재의 결정에 대해 “공영방송과 민간방송의 이중 시스템을 유지하고 있는 독일에서 공영방송이 본분을 잃고 지속적으로 프로그램 수준을 떨어뜨린 상황에 눈을 감은 졸속 결정”이었다고 비판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공영방송의 수신료 제도 자체도 문제 삼았다.
쥐트 도이체 차이퉁은 특히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헌재의 결정을 정확히 읽고 해석해 법을 제정해서라도 합리적이고 공정한 수신료 정책을 세울 방법을 모색하라”고 촉구했다.
▽“공영방송의 저질화” 맹타=독일 최고 권위 일간지인 FAZ는 “이번 헌재 결정이 1960년대가 아니라 2007년 9월 11일 내려진 결정이라는 게 놀랍다”며 “한마디로 시대착오적인 결정”이라고 비판했다. 독일에서 공영방송 체제가 성립된 1960년대에는 재정 독립성을 통해 정치적 독립을 확보하기 위해 수신료가 필요했지만 이제는 사정이 완전히 다르다는 것.
FAZ는 공영방송이 최초의 사명에서 아주 멀어졌다고 비판했다. 이 신문은 특히 ARD와 ZDF는 민간방송과 경쟁하면서 공영방송이 해서는 안 되는 일을 너무나 많이 했는데 헌재가 이를 검토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FAZ는 “공영방송사가 격투기를 비롯해 대중의 말초적 신경을 자극하는 프로그램에 연간 2000만 유로를 퍼붓고 있다”며 저질 프로그램의 구체적 사례도 제시했다.
SZ도 공영방송이 대중 취향적 프로그램을 불합리할 정도로 많이 편성했다고 지적했다.
▽원칙 없는 광고와 후원=FAZ는 공영방송이 수신료를 받아 운영하면서도 광고와 기업 후원을 한 번도 포기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허용된 시간을 넘어 광고를 하는 경우도 허다하다고 지적했다.
잇따른 후원 비리도 도마에 올랐다. ARD는 지난해 ‘투르 드 프랑스’에 출전하기 직전 도핑 혐의를 받고 제외된 사이클 선수 얀 울리히를 후원해 스캔들에 휘말렸다. 또 ‘마리엔호프’라는 프로그램을 위해 기업에서 몰래 약 6만 유로를 후원받은 비리가 드러났다. FAZ는 이를 공영방송으로서는 있을 수 없는 비리라고 비판했다.
SZ는 “ZDF와 ARD는 해마다 예산이 모자란다고 호소하면서 갖가지 군소 채널과 프로그램 제작 사업에 손을 뻗쳐 왔다”며 방송시장 지배를 꿈꾸는 이들의 야심과 방만한 경영을 질타했다. SZ는 “헌재의 이번 결정은 자회사까지 포함해 사실상 독일 방송업계를 지배해 온 공영방송에 일방통행권을 준 것이나 마찬가지”라며 작은 민간방송들이 공영방송과 경쟁하기에 더욱 어려운 처지가 됐다고 비판했다.
그동안 독일 민간방송들은 공영방송이 수신료를 받아 운영하는 것에 대해 ‘불공정 거래’라며 비판의 목소리를 높여 왔다. 독일 시청자들도 광고까지 하는 공영방송이 턱없이 높은 수신료를 받는 것에 큰 불만을 표시했다.
▽수신료 제도는 유지돼야 하는가=독일에서는 세금 형태로 수신료가 부과되는 것이 아니라 방송수신료수금센터(GEZ)가 직접 시청자에게서 수신료를 걷는다. SZ는 시청자들의 시청료에 대한 거부감은 물론 GEZ의 강제 징수 방식에도 불만을 표시하고 있다고 전했다. 또 디지털 환경 변화에 따라 징수에 기술적 한계도 나타나고 있다고 지적했다.
수금 방식에 대한 시청자들의 불만으로 GEZ가 이사 때마다 쫓아다니며 성가시게 하고 사설탐정을 보내 TV 시청을 확인하는 것이 시민의 자유를 침해한다고 이 신문은 전했다.
SZ는 또 디지털 세계에서 수신료를 걷을 수 있는 기술 자체가 한계에 봉착했다는 점을 지적했다. 오늘날 TV와 라디오는 컴퓨터와 휴대전화 등 온갖 디지털 기기로 듣고 볼 수 있는데 이런 기기들은 수신료를 걷는 데 적합하지 않다는 것.
SZ는 ‘디지털 기술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ARD ZDF 도이칠란트라디오의 영역은 어느 정도여야 하는가’ ‘달라진 세상에서 이들 공영방송의 진짜 사명은 무엇인가’ ‘얼마나 많은 돈이 공영방송에 투자돼야 하는가’ 등에 대해 헌재 결정은 아무런 해답도 제시하지 못한 근시안적인 것이라고 비판했다.
한국도 독일처럼 시청자에게 직접 수신료를 걷어 왔다. 하지만 수신료 납부 거부 운동이 확산되면서 징수율이 떨어지자 1994년 전기료와 통합 징수하는 체제로 개편됐다.
파리=송평인 특파원 pis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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