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 년 만에 과거 기사를 들척이는 일도 유쾌하지 않았지만, 조승희의 성난 얼굴이 떠오를 땐 제3자로서도 힘겹게 느껴질 정도였다. 하물며 피투성이였던 총격 현장을 지나면서 희생된 동료 학생과 교수의 빈 자리를 봐야만 하는 학생들의 일상은 온전했을 리가 없다.
그들의 고통을 나누고, 즉각적인 분노보다는 총기 난사범도 피해자의 일부로 끌어안았던 버니지아공대 사람들은 지난 6개월의 고통을 어떻게 견뎌왔을까.
15일 워싱턴에서 남서쪽으로 4시간 거리의 대학 구내에 도착한 뒤 총격 사건 현장인 노리스 홀 강의동을 먼저 찾았다. 6개월 전에는 경찰 저지선 때문에 30m 이내로 접근조차 어려워 발길을 돌려야 했던 그 곳이다.
총격이 벌여졌던 204, 206, 207, 211호는 폐쇄된 채 방 번호조차 떼어져 있었다. 총격으로 구멍 났던 강의실 문은 새 나무로 다시 짰지만, 문에는 열쇠구멍만 있을 뿐 손잡이가 전혀 달려 있지 않았다.
'ㄱ'자 모양인 건물의 2층 반대쪽에는 대학원생 연구실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다. 이름 공개를 거부한 한 중국 유학생은 "나도 콜로라도 주에서 기계공학 박사를 딴 뒤 9월 학기에 처음 옮겨왔다. 나는 총격 현장에 대한 고통이 없으니까 이곳에 배치됐다. 몇몇 조교들이 다른 건물로 옮겨갔다"고 했다.
6개월 전 충격의 잔상이 대학 구내 곳곳에서 손에 잡히기를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였다. 학생들은 강의실을 분주히 옮겨 다니거나, 시끌시끌한 구내식당에서 웃고 떠들었고, 잔디밭에서 원반던지기를 하고 있었다. 흠잡을 데 없는 시골 대학가의 일상이었다.
32명의 희생자의 이름을 새겨 넣은 추모석 32개가 대 운동장의 잔디밭 한 편에 반원을 그리며 놓여진 야외 기념관이 거의 유일한 흔적이었다. 사건 직후 이곳을 뒤덮었던 조화더미도 이젠 보이지 않았다. 마이클 폴 학생의 추모석 앞에 여자친구 미쉘이 가져다 놓은 생일 카드와 해바라기 3,4송이가 눈에 띄었다.
"마이크.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벌써 6개월이라니 믿기지 기지 않아. 너를 매일 생각해. 얼마 전 성경구절 일부와 대학 로고를 몸에 문신했어. 너를 기억하기 위해서야. (중략) 하늘에서 잘 지내길 바래. 기도할게. 사랑해."
사건 직후 총기 난사범 조승희의 영혼마저 위로하겠다며 놓여졌던 조승희 추모석은 이미 보도된 대로 치워져 있었다.
기념석 뒤편에 조기(弔旗) 상태인 버지니아 주 깃발도 흔적이라면 흔적이었다. 그러나 지나가는 학생들은 "총격 사고 추모가 아니라 며칠 전 사망한 인근 지역 하원의원 때문"이라고 설명해 줬다.
대학신문인 컬리지잇타임스도 15일자에는 "위기상황 때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로 경고문을 띄우겠다"는 대학 당국의 발표가 1면에 실렸다. 그러나 "기숙사 침대를 큰 것으로 바꿔준다"는 생활형 기사보다 우선 순위가 밀려나 있었다.
이 신문 편집장인 4학년 에이미 스틸(21) 양은 "놀랍게도 대학 당국은 6개월을 맞아 아무런 행사를 준비하고 있지 않다. 빨리 잊고 일상으로 돌아가는 뜻으로 이해하고 있다"고 말했다.
6개월 사이에 사무적인 일처리는 계속됐다. 수사당국이 '범행동기를 못 찾았다'는 수사결과 발표, 조승희 가족을 제외한 희생자 가족에게 18만 달러(약 1억6000만원)의 위로금 전달, 역대 최대규모인 5215명의 신입생 등록이 있었다.
그러나 대학신문의 독자투고란에는 "조승희 가족도 아들을 잃은 피해자다. 그들의 슬픔이 희생자들의 것보다 작다고 볼 수 없다"며 조승희의 부모에게도 위로금이 지급되어야 한다는 글이 이어졌다. 일부 버니지아공대 학생들의 '조승희도 품어보겠다'는 견해는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상처를 잊기 위한 보이지 않은 노력이 감지됐다.
이날 저녁 열린 학생회관에서 총기규제와 감세정책을 주제로 이 대학 정치학회가 주최한 정치토론회가 그랬다. 공화 민주 자유당 소속 대학생 3명이 나와 주제발표(각 4분) 및 반론(각 2분)을 폈다. 하지만 '4월16일 사건'으로 불리는 조승희 총기 사건을 거론하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총기규제를 강조하는 민주당 지지 학생으로선 더없이 효과적인 소재인데도.
토론회 직후 정치학회 소속 학생에게 까닭을 물었다. "지나치게 논쟁적으로 흐르고, 희생자 가족 및 친구들의 상처를 되짚어내기 위해 '언급 안 한다'는 사전 합의를 했다"는 답이 돌아왔다.
'조승희'라는 말은 금기어가 됐다. 토목과 유학생인 안용한 씨는 "학생들은 그를 총잡이(shooter) 그 놈(the guy)이라는 표현을 쓰거나, 그저 조(Cho)라고 줄여 부를 뿐 그의 이름을 온전히 안 부르려 한다"고 했다.
스틸 편집장도 "학생들은 사라져버린 조승희 보다는 대학당국의 무성의한 초기대응에 분노하고 있다. 내일(16일)이 민사소송을 낼 수 있는 시한인데, 일부 피해자 가족이 소송을 내더라도 놀랍지 않게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이날 밤 전화통화를 한 공학교육 박사과정의 제러미 개릿 씨는 대화 속에 확연하게 슬픔이 묻어났다. 중국계인 헨리 리 등 제자 2명을 사고로 잃었던 그는 4월 기자와 마주친 뒤 "한국인은 잘못이 없다. 조승희를 끌어안지 못한 대학과 미국사회의 잘못이다"라는 e메일을 보내와 본보에 그의 글이 실린 적이 있다.
그는 "좀 나아졌다. 사고 현장인 노리스 홀에는 그동안 발을 끊고 지내다가 지난 주 처음 가 봤다"고 했지만, 목소리는 가늘게 떨렸다.
워싱턴=김승련특파원 sr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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