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 - 인물에 관한 칼럼에서 자세히 다루다
신해혁명에 대해 일본 교과서에서는, 러일 전쟁 후 중국과 조선에서 일어난 중대한 변화의 하나라고 기술한다. 도쿄 서적의 『새로운 사회 역사』에서는 약 1페이지 정도 기술하고 있다.
《중국에서는 제국주의 열강의 압박에 대항하려는 움직임이 강해져, 청을 무너뜨리고 민족의 독립과 근대 국가 건설을 목표로 하는 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중심인물이 삼민주의를 주창한 쑨 원(孫文)입니다》라고 서론을 시작한 후, “아시아 최초의 공화국”인 중화민국이 건국되었지만, 위안 스카이(袁世凱)의 독재 정치를 거치며, 군벌이 할거하게 된 개요를 설명하고 있다.
3•1 독립 운동과 5•4 운동에 대해서는 인도의 민족 운동과 함께 “아시아의 민족 운동”이라는 테마에서, 2페이지에 걸쳐 정리하고 있다. 학습 지도 요령에는 제1차 세계대전 후의 “민족 운동 고조”를 이해한다고 되어 있으며, 거기에 맞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일본이 중국에게 억지로 승인하게 한 21개 조의 요구에 대해서는 그 요점을 뽑아 따로 게재하고 있다.
중국과 조선의 사건에 관해, 이 교과서에서 역점을 둔 내용은 일본과의 관련이 있는 인물 소개 칼럼이다. 신해혁명에서는 ‘쑨 원(孫文)과 일본’ 이라는 제목으로 쑨 원(孫文)이 일본과 깊은 관계가 있었으나, 점차 일본의 대 중국 정책을 비판하게 된 것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3•1 독립 운동에 대해서는 조선 백자의 아름다움을 평가한 민예 운동가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悦)를 소개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인용한다.
《우리 일본인이 현재 조선인의 입장에 있다고 가정해 보자. ……우리 일이 아니라고, 그것을 단순한 폭동이라 치부하며 경멸하는 것뿐이다. ……반항하는 그들보다 훨씬 더 어리석은 것은 압박하는 우리들이다.》
도쿄 서적의 교과서에 야나기(柳) 씨가 등장한 것은 10년 전의 일이다. 와타나베 노리오 (渡辺能理夫) 사회 편집부장은 “역사를 다면적으로 학습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 이라고 말한다.
(요시자와 다쓰히코 吉沢龍彦)
■ 중국 - 부르조아 지도의 민주 혁명
중국에서 반수 이상의 학교가 사용한다는 인민 교육 출판사의 『중국 역사』 에서는 신해혁명을 “근대화의 모색” 이라는 단원에서 4페이지에 걸쳐 다루고 있다. 현 중국 정부가 쑨 원(孫文)을 높이 평가하는 것을 반영하여, 쑨 원(孫文)과 관계되는 기술이 많다. 도쿄에서 중국 동맹회를 발족한 것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쑨 쭝샨(孫中山)은 혁명 세력을 단결하여, 통일된 혁명 조직인 중국 동맹회를 설립하자고 제창했다.(중략)그 해 8월, 중국 동맹회 성립 대회가 일본 도쿄에서 개최되었다. (중략)동맹회 성립은 전국의 부르조아 민주 혁명 운동에 박차를 가했다.》
학습 지도 요령에 해당하는 『역사 과정 표준』 에서는 “쑨 쭝샨(孫中山)의 주요한 혁명 활동을 이해하고, 우창 봉기를 알며, 신해혁명의 역사적 의의를 탐구한다”라는 지침을 내리고 있다.
5•4 운동에 대해서는 “신 민주주의 혁명의 흥기” 라는 단원으로 1과 3분의 2 페이지가 할당되었다. “5•4 애국 운동”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파리 강화 회의에서 중국의 요구가 거절당해, 운동이 시작된 경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요구 거절 소식이 국내에 전해지자, 쌓이고 쌓인 중국 인민의 분노가, 화산과 같이 폭발했던 것이다!》
『역사 과정 표준』에서는 “부르조아 계급이 지도하는 구 민주주의 혁명의 종결을 고하고,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지도하는 신 민주주의 혁명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다.”라며 혁명 운동의 전환점으로 평가하고 있다. 교과서에서도 “처음으로 제국주의와 봉건주의에 철저히 반대한 애국 운동이었으며, 중국의 신 민주주의 혁명의 시작이었다” 고 기술한다. 바로 다음 항에서는 “중국 공산당의 탄생” 을 다루고 있다.
한편, 3•1 독립 운동에 대해서는 중국사에서도 세계사에서도 일체 언급하지 않고 있다.
(사토 가즈오 佐藤和雄)
■ 한국 - 세계의 민족 운동과 비교
신해혁명에 대해서는 세계사를 취급하는 『사회 2』 (도서출판 디딤돌)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혁명 세력은 청의 타도를 선언하며 무장 봉기하였다. 봉기가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황제가 퇴위하고 쑨 원((孫文))이 임시 대총통으로 추대되어 중국 최초의 공화국이 탄생하였다》
집필을 담당한 태릉 고등학교의 김육훈 교사는 “아시아 최대 나라에서 군주제가 무너지고, 국민 국가를 세우는 운동이 일어났다. 식민지였던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독립 후에는 공화제로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라며, 신해혁명의 영향을 지적했다.
『사회 2』에서는 인도, 베트남, 이집트 등 대국의 지배에 저항한 민족 운동에 관한 기술이 10페이지에 달한다. 3•1 독립 운동에 대해서는 “ 제1차 대전 후, 제창된 민족자결주의가 계기가 되었다.”라고 기술하였고, 중국의 5•4 운동과 나란히 설명하고 있다. 김 교사는 “자국의 민족 운동에만 집착할 것이 아니라, 세계 각지의 운동과 비교하는 안목을 키우고 싶다.”라고 말한다.
한편, 자국사에서는 3•1 운동과 그 영향에 대한 기술만으로 9페이지를 할애했다.
《그때까지 끈질기게 계속되어 온 한민족의 독립 운동을 하나로 정리하고 온 민족이 하나가 되어 전개된 최대 규모의 독립 운동이었다.》
운동은 국내외에 임시 정부를 만드려는 움직임으로 이어진다. 《3•1 운동은 우리 민족의 목표가 완전한 자주 독립이라는 것을 확인시켜 주었고, 이를 계기로 우리 민족의 독립 운동은 국내외에서 더욱 다양하게 전개될 수 있었으며, 그 결과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수립되었다.》
현재 한국 헌법의 전문에는 국민이 “3•1 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라고 명기되어 있다. 국사 편찬 위원회의 허영란 박사는 “한국의 법적 정통성은 3•1 운동에 있으며, 교과서에서도 자세하게 가르친다.”라고 말한다. 교과서에서는 중국과 인도의 민족 운동에 영향을 주었다는 것도 강조하고 있다.
(사쿠라이 이즈미 桜井泉)
■ 대만 - “국부”라는 경칭이 사라진 쑨 원(孫文)
신해혁명과 중화민국 건국에 대해서는 중국사에서 상당히 자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국민 중학•사회』 (남일서국(南一書局))에서는 우창(武昌)봉기에 대해 1페이지 정도를, 위안 스카이(袁世凱)의 제정(帝政) 운동까지의 민국 초기에 관해 2페이지를 할애하고 있다. “민국 초기의 소란”이라는 단원에서는 이 시대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신해해명 후, 아시아 최초의 민주공화국인 중화 민국을 수립하였지만, 국운은 순조롭지를 못했다. 위안 스카이(袁世凱)가 공화제를 무너뜨리고, 군벌이 난립하여, 남북 분열의 사태에 이르렀다. 그리고 나라 밖으로도 계속되는 우환으로 마음 편할 날이 없었다.》
한편, 1983년의 『역사 과정 표준』에 근거한 교과서에서는 “국부・쑨 쭝샨(孫中山) 선생님” 의 혁명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많은 페이지를 할애하였다. “국민 혁명 운동의 위대한 창도자”로 추앙되었으며, 후의 국민당 지도자인 장제스(蔣介石)와 함께, “선생님” 이라는 경칭으로 불리었다.
현행 교과서에서의 쑨 원(孫文)은 혁명 지도자 중의 한 명이라는 평가이다. 사진 설명에는 “국부” “쑨 쭝샨(孫中山) 선생님” 이란 표현이 남아 있는 것도 있지만, 2003년의 “초ㆍ중학교 9년 일관 과정 요강”에 따르면, 본문에서는“국부”등의 경칭이 사라졌다. 현 민진당 정권이 추진하는 역사 교육의 대만화, 탈 중국화의 흐름이다.
남일서국(南一書局)의 교과서 편집 지도 위원인 초 호이민(周恵民)•정치대학 역사학부 교수는 “‘국부’ 는 국민당이 만든 개념이다. 그를 위대한 인물로 만들어 내었지만, 그 후 연구에서 그다지 위대한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쑨 원(孫文)이 없었더라면 중국은 더 좋은 쪽으로 발전했을지도 모른다.” 라고 말한다.
5•4 운동에 대해서는 2페이지를 할애하여 높이 평가하고 있다.
《5•4 애국 운동은 중국 사회 각 계층에 퍼진 자각의 표현으로, 국가의 자립과 부강을 요구하는 국민 의식이 높아졌다.》
한편, 3•1 운동에 대해서는 세계사의 “아시아의 민족 부흥 운동”이라는 항목에 《1919년, 서울에서 대규모 항일 운동이 일어났다.》라고 기술했지만, “3•1 운동”이라는 표현은 보이지 않는다.
(다무라 히로쓰구 田村宏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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