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남미 베네수엘라와 볼리비아에서는 연일 극렬한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 그 혼란의 한복판에는 헌법이 있다. 대통령이 정권 연장을 위해 개헌을 추진하자 이에 반발한 국민이 들고 일어났다.
파키스탄에선 대통령이 집권 연장을 위해 대법원 재판부를 친정부 인사로 갈아 치웠고 우즈베키스탄 대통령은 3선 금지 규정을 무시하고 다시 대선에 출마했다. 헌법학자들은 집권자들의 이런 행태를 ‘헌법에 대한 반달리즘(헌법 유린행위)’으로 규정한다.
1930년대 독일 나치당이 집권 후 잇단 개헌을 통해 전 세계를 재앙으로 몰아넣었듯 이들은 법치라는 형식적 절차를 따를 뿐 실제로는 헌법을 유린하고 민주주의를 위태롭게 한다는 지적이다.
○ 개헌으로 종신 대통령 꿈꾸는 남미 지도자들
베네수엘라는 다음 달 2일 우고 차베스 대통령의 영구 집권을 허용하는 개헌안을 놓고 국민 투표를 실시한다. 지난달 24일 의회를 통과한 개헌안은 △대통령 연임 제한을 없애고 △대통령에게 중앙은행 통제권과 국가비상사태 시 언론 폐쇄 권한을 주는 조항을 담고 있다.
AP와 AFP통신은 개헌안을 놓고 국론이 양분돼 있다고 전했다. 현지 여론조사기관 힌터라세스가 최근 주민 1333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는 개헌에 반대한다는 응답자가 46%, 찬성표를 던지겠다는 비율이 45%였다.
야당과 우파 단체, 대학생들은 개헌안의 의회 통과 후 연일 반대 시위를 벌이며 “독재 정권 출범을 막아야 한다”고 외치고 있다.
차베스 대통령을 스승(mentor)으로 여기는 에보 모랄레스 볼리비아 대통령도 연임 제한을 없애고 천연자원의 국가 소유권 확대를 뼈대로 하는 개헌안을 내놓았다.
24일 야당 의원들이 불참한 가운데 소집된 제헌의회가 개헌안을 통과시키자 이에 반대하는 시위대들은 “모랄레스가 장기집권을 위해 차베스를 따라 하고 있다”며 연일 시위를 벌이고 있다.
2004년 개헌으로 지난해 연임에 성공한 알바로 우리베 콜롬비아 대통령도 이달 초 3선을 위한 개헌을 추진할 뜻을 밝혀 헌법재판소의 반발을 샀다.
○ 헌법 조문 멋대로 해석도
복잡한 개헌 절차 없이 자의적 헌법 해석으로 장기 집권을 노리는 대통령들도 있다.
2000년 재선에 성공한 이슬람 카리모프 우즈베키스탄 대통령은 3선 연임을 금지하는 헌법을 아예 무시하고 이달 19일 대선 후보로 정식 등록했다. 대선일은 다음 달 23일.
1990년 집권한 카리모프 대통령은 1995년 국민 투표를 통해 임기를 2000년까지 연장해 재선한 뒤 2002년엔 다시 국민투표로 임기를 5년에서 7년으로 늘렸다. 3선 도전이 위헌이라는 지적에 대해 측근들은 “7년 임기는 한 차례만 한 셈”이라는 억지 논리를 펴고 있다.
내년 3월 대선을 앞둔 러시아에서도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 측근들이 ‘개헌 없는 3선’ 시나리오를 제시해 논란이 벌어졌다고 모스크바 타임스가 최근 보도했다.
우선 푸틴 대통령이 이번 총선에서 하원의원에 당선된 후 대통령 직을 사임하고 몇 달 뒤 대선에 출마해 위헌 시비를 피하는 시나리오다. ‘연달아’ 재임할 수 없다는 헌법 규정을 피해갈 수 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다.
측근들은 푸틴 대통령이 임기 후 ‘국가 지도자’로 남고 그 아래에 대통령을 두는 방법도 대안으로 제시했다. 그러나 올레그 루만체프 러시아 헌법개혁재단 이사장은 “헌정 질서와 헌법의 정당성 자체에 타격을 주는 발상”이라고 비판했다.
이진영 기자 eco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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