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9·11테러 이후 테러와의 전쟁에 집중하느라 중남미 지역을 챙길 겨를이 없는 동안 중국과 러시아는 물론 아시아 국가들이 중남미 국가들과의 관계 개선에 적극적으로 나섰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 거슬러 올라가면 1990년대 이래 자유무역과 개방정책을 기치로 내건 미국의 신자유주의 정책이 중남미 경제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면서 미국은 이미 전통적인 ‘뒷마당’을 잃기 시작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여기에 최근 부상한 좌파 정권들의 반미주의도 한몫했다.
이 같은 미국의 영향력 퇴조를 두고 미국 시사주간 타임 최신호(10일자)는 미국이 중남미에서의 헤게모니를 장악하기 위해 2세기 넘게 유지해 온 ‘먼로 독트린’이 이젠 완전히 사라지게 됐다고 진단했다.
○ 중남미에서 작아지는 미국
미국이 아직은 중남미의 최대 교역 상대이지만 중국 러시아 이란이 중남미 시장 개척에 나서고 외교관계를 수립하면서 양상이 달라지고 있다. 심지어 북한도 최근 몇 주 사이 과테말라, 도미니카공화국과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특히 중국의 움직임이 예사롭지 않다.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은 2004년 11월 중남미를 순방하면서 10년간 1000억 달러 투자를 약속했다. 아직 투자가 본격화되지 않았지만 칠레의 구리, 브라질의 철광석, 아르헨티나의 콩에 대한 중국의 ‘식탐’은 상상을 초월한다.
마무드 아마디네자드 이란 대통령은 지난 1년여 동안 중남미를 3차례나 방문해 10여 건의 상호협력을 약속했다. 러시아는 지난해 베네수엘라에 30억 달러 규모의 무기를 판매했다.
이런 기류에 대해 전문가들은 “먼로 독트린에 따라 20세기 초만 해도 중남미의 우방국 독재자를 지원하기 위해 군대를 보낼 정도였던 미국의 영향력은 이젠 옛날 얘기가 됐다”고 지적했다.
○ 남미의 독자 행보 강화
중남미 국가들의 목소리도 커지기 시작했다. 특히 미국이 주도한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홍역을 치른 중남미에 포퓰리즘과 실용주의를 내세운 정권들이 속속 등장하면서 미국은 중남미 수출시장마저 잃고 있다.
중남미의 좌파 사회주의권 정상들의 반미 노선은 어느덧 조직화 단계에 접어들었다.
지난달 10일 칠레 산티아고에선 우고 차베스(사진) 베네수엘라 대통령, 에보 모랄레스 볼리비아 대통령 등 좌파 정상들은 이른바 ‘인민정상회담’을 열어 반미 연대와 지역협력 문제는 물론 미주기구(OAS)를 대체하는 새로운 기구의 창설을 논의했다.
또 브라질 베네수엘라 에콰도르 등 신흥 에너지 강국은 신자유주의 정책의 첨병인 국제통화기금(IMF), 세계은행 등 국제금융기관으로부터의 독립 움직임을 꾀하고 있다. 중남미 7개국 정상은 9일 남미은행을 공식 출범시킬 계획이다.
○ 미국의 쉽지 않은 만회 노력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 이후 중남미에서 ‘잃어버린 시간’을 회복하는 데 초점을 두려고 하지만 쉽지는 않아 보인다.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은 4일 기자회견에서 차베스 대통령의 베네수엘라 개헌 시도가 실패한 데 대해 “미국은 ‘베네수엘라 효과’의 맥락에서 남미에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고 말했다. 뭔가 중남미에 대한 영향력의 끈을 되찾겠다는 의사로 풀이된다.
그러나 중남미 국가들의 반미정서를 돌리기엔 역부족이라는 게 대체적인 지적이다. 타임은 “부시 행정부의 민주주의 확산 정책과는 다른 길을 걷는 중남미 국가들의 현실을 지켜보면 무덤 속의 먼로 대통령도 돌아눕고 싶은 심정일 것”이라고 전했다.
김영식 기자 spear@donga.com
::먼로 독트린::
미국 5대 대통령 제임스 먼로가 1823년 12월 천명한 외교정책. 유럽 열강에 아메리카 대륙에 간섭하지 말라고 강조하며 중남미 전역에 대한 미국의 독점적 헤게모니를 정당화한 정책이다.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은 이 외교정책을 확대해 미국이 중남미에서 경찰력을 행사할 것을 주장했다. 이를 통해 미국은 카리브 해 지역에 진출하고 중남미 국가들의 정치에 직간접적으로 개입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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