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서도 美사회-이민책임론 설득력 잃어
“한국요? 멀리서 왔군요.”
미국 버지니아공대 총격사건 다음 날인 4월 17일 오전. 굳게 잠긴 조승희 부모의 집 부근에서 만난 주민 마셜 메인 씨는 ‘한국 기자’에게 무덤덤한 반응을 보였다.
“용의자가 한국 출신 영주권자 조승희로 밝혀졌다”는 충격적 발표를 듣자마자 버지니아 주 페어팩스에 있는 조 씨의 부모 집으로 황망히 달려간 기자는 의아했다. “경찰 발표를 TV에서 보았으면 코리아(Korea)라는 단어에 반응이 있을 법한데….”
그러나 메인 씨의 답변은 명쾌했다. “충격적인 사건의 용의자가 이웃에 살고 있었다는 데 정말 놀랐어요. 하지만 그가 어느 나라 사람인지는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그 직후 통화를 한 미국인 지인들의 반응도 비슷했다. “개인의 범행일 뿐이다. 나라를 대표해서 온 사람도 아니고 정치적 테러도 아니지 않으냐” “범인은 미국인이거나 영국인일 수도 있었다. 한국인이란 건 단지 여러 우연 중 하나일 뿐이다”라는 대답들이었다.
이 같은 반응을 급히 서울로 송고했지만 이미 ‘집단적 자책감’ 속으로 빠져들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주목을 끌기는 힘들었다.
총격 사건 후 한국에서는 1992년 로스앤젤레스 폭동의 기억을 떠올리며 교민 안전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쏟아졌다. 한미 관계, 특히 불과 보름 전 서명한 자유무역협정(FTA)에 나쁜 영향을 미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왔다. 정부 일각에선 추모 사절단을 보내자는 의견이 나왔다. 이태식 주미대사는 추모예배에서 “슬픔을 나누고 자성하는 뜻에서 32일 동안 금식을 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곧 교민 2세들을 주축으로 “미국을 너무 모른다”는 반론이 일기 시작했다. “미국인들은 이번 사건이 정신이상자의 광란극으로서 허술한 총기 관리 시스템이 문제라고 여기는데 왜 한국인들이 사과를 하느냐”라는 문제 제기였다. 미국의 지도층 인사들도 “한국과는 무관한 일”이라고 강조했다.
한국 내 여론도 돌아서 사과론에 대한 비판이 거세게 일었다. ‘집단 히스테리’ ‘극단적 집단주의’라는 용어까지 등장했다.
사건 후 거의 8개월. 전문가들은 당시의 논란이 미국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좋은 교재’가 됐다고 입을 모은다.
1969년 이민 온 리처드 신(신동준) 박사는 13일 “지금까지 조승희 사건에 대해 한국의 책임을 거론하는 것을 들어 본 일이 없다”며 “미국 사회의 반응은 성숙하고 차분했다”고 말했다.
신 박사는 “한국 사회의 집단적 사과 움직임에 찬성하지 않지만 그것이 나빴다고만 생각하지는 않는다”고 덧붙였다.
실제로 필라델피아 인콰이어러지는 애도와 반성으로 이어지는 한국 사회의 반응을 전하면서 “감사한다”고 논평했다.
버지니아공대 인근의 한 주민은 “인터넷과 세계화의 영향으로 다른 문화권에 대한 이해가 높아지면서 낯선 반응을 이해할 수 있게 됐다”며 “한국인들의 반응은 진심 어린 것임을 알게 됐고 그 진심이 가슴에 와 닿았다”고 말했다.
주미 한국대사관 관계자는 “당시 이 대사는 출장에서 급히 돌아와 사전 준비된 원고 없이 발언하면서 ‘사과’라는 단어를 사용했지만 본의는 슬픔을 함께 나누고 싶다는 뜻을 강조하려는 것이었는데 한국에선 단어 하나를 놓고 비난이 쏟아졌다”고 설명했다.
한국 사회가 교민에 대한 보복을 우려했던 데 대해 한 교포 학자는 “미국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음을 이 일로 깨닫게 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 대책본부장이었던 권태면 워싱턴 총영사는 “사건 초기엔 교민 사회조차도 물리적 정신적 피해를 걱정했던 게 사실”이라며 “하지만 ‘멜팅팟’(melting pot·여러 인종 문화가 어울린 사회)으로 불리며 감정보다 이성을 앞세우는 미국 사회의 성격이 그 후 잘 드러났다”고 말했다. 2002년 미군 장갑차 사건 때 한국 사회의 반응과 비교하는 사람도 많았다.
한편 이 사건은 이념적 성격을 띤 ‘미국 사회 책임론’ ‘이민 책임론’ 논쟁으로도 번졌다. 한국 일각에서 사건의 원인을 이민 1.5세대의 부적응이나 미국 사회의 따돌림에서 찾으려는 움직임이 일어난 것.
“조승희가 발표를 하는데 목소리가 이상해 반 아이들이 웃었다”는 등의 에피소드가 이 같은 주장의 근거였다. 일부 언론은 ‘비정한 미국 사회’ ‘낯선 땅에 적응하지 못한 영혼’이라며 미국 사회 구조에 책임을 돌렸다.
그러나 상당수 교민은 △이민 초기에는 영어 때문에 누구나 어려움을 겪지만 대다수 아이들은 별 문제 없이 적응한다는 점 △한국인이 많은 워싱턴 근교에서 인종차별로 힘들어하는 아이들은 거의 없다는 점 등을 들며 “모든 것을 사회와 환경의 책임으로 돌리려 하는 한국 사회를 이해하기 어렵다”고 반박했다.
실제로 같은 환경에서 자란 조승희의 누나는 미국 최고 명문대를 나와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았다.
이후 조승희가 미국 이민 전부터 말을 거의 하지 않는 등 폐쇄적인 성격을 보였고 법원 판결로 정신질환 치료를 명령받은 사실 등이 밝혀지면서 ‘미국 사회 및 이민 책임론’은 설 자리를 잃어 갔다.
워싱턴=이기홍 특파원 sechep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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