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 - 중국으로의 ‘침략’이라고 표현
일본의 중학교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새로운 사회 역사』(도쿄서적(東京書籍))는 만주 사변과 만주국 건국에 대해 1 페이지를 할애하고 있다.
《만주에서 일본 권익을 확보하기 위해, 만주를 중국에서 분리할 것을 주장한 현지 군부(관동군)는 1931년 9월 18일, 펑톈(奉天) 교외의 류타오후(柳条湖)에서 남만주 철도를 폭파하고, 이를 계기로 군사 행동을 개시했습니다(만주 사변). 만주(満州)의 주요부를 점령한 관동군은 1932년 3월, 청조 마지막 황제인 푸의(溥儀)를 원수로 추대하여 만주국을 건국하고 실질적으로 지배했습니다.》
이후, 국제연맹이 만주국 건국을 인정하지 않고, 일본군의 철병을 요구하자 이에 반발해 일본이 연맹을 탈퇴한 사실이나, 파시즘 국가인 독일 등과 결부된 점, 수상 습격 사건 등이 잇달아 일어나 군부의 정치적 발언력이 점차 강화된 것 등을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경과를 정리한 항에는 ‘일본의 중국 침략’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1980년대에 불거진 교과서 문제에서는 일본의 전쟁 행위와 식민지 지배를 ‘침략’이라고 표현할 지가 쟁점이 되었지만, 도쿄서적의 와타나베 노리오(渡辺能理夫) 사회편집 부장은 “현재는 타국의 영토나 주권을 침해한 행위를‘침략’이라 표현하고 있다”고 말했다.
덧붙여 말하자면, 열강 제국에 의한 식민지 분할에 대해서도 ‘구미 열강의 침략’이라는 표현이 사용되고 있다.
만주 사변에 이르는 국내외의 정세에 대해서는 4 페이지에 걸쳐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세계 공황과 블록경제화, 이탈리아와 독일에서의 파시즘 대두를 설명한 다음, 일본에서도 공황이 일어나고 정당 정치의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혼란한 상황이 계속되었다는 것이 적혀 있다.
만주에서의 항일운동이나 일본에서 건너간 개척단 등에 대해서는, 간단하게 기술하는 추세인 현행 판에서는 소개하지 않았다. 그 대신에 푸의(溥儀)가 일본 군인에게 둘러 싸여 있는 사진을 실어 괴뢰 국가의 실태를 시각적으로 전하고 있다.
(요시자와 다쓰히코 吉沢龍彦)
■ 중국 - 9•18사변, 설명에 1 페이지 반
중국에서 가장 폭 넓게 사용되고 있는 인민교육 출판사의 역사 교과서 『중국 역사 8년급』에서 만주 사변은, ‘중화 민족의 항일 전쟁’이라는 단원 첫 머리에서 다루고 있다. 여기서 부터 중국 인민에 의한 ‘항일 전쟁’이 시작되었다고 판단하고 있다.
이는 학습 지도 요령에 해당하는 ‘역사 과정 표준’을 충실히 따른 내용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만주 사변은 ‘9•18 사변’으로 불리고 있다. 과정 표준에서는 ‘9•18 사변(류타오후(柳条湖)사건)의 역사적 사실을 약술하고 있으며, 9•18 사변 이후, 중국에서 국부적으로 항전이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알자”라는 것이 지침이다.
교과서에서는 ‘잊어서는 안 되는 9•18 사변’이라는 제목으로 1 페이지 반 정도를 할애하고 있으며 첫 부분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일본 침략군은 계획적으로 류타오후(柳条湖) 사건을 일으켰으면서도, 중국군이 철도를 파괴했다는 트집을 잡아, 이것을 구실로 중국 동북 군이 주둔하던 베이다잉(北大營)로 진격하여 선양(瀋陽)성을 포격했다. 9•18 사변이 발발했던 것이다》
일본의 교과서가 만주 사변에 이르는 국제 정세를 자세하게 설명한 것에 비해, 중국의 교과서는 그러한 기술은 일체 없다. 중점을 두고 있는 것은 (1) 일본 측 모략에 대한 자세한 설명 (2) 장제스(蔣介石)가 동북 군에 저항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린 관계로 동북부가 점령된 점, 이 두 가지이다.
또한, ‘만주국’은 중국에서는 ‘위만주국(偽満州国)’이라 불리며, 일본에 의한 ‘만주국’ 건국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동북부가 함락된 후, 1932년에 일본은 이미 퇴위하였던 청조 마지막 황제 푸의(溥儀)를 옹립하여, 창춘(長春)에서 위만주국(偽満州国) 괴뢰 정권을 수립하여 동북부를 중국에서 분열시키려 했다. 일본 침략자의 말발굽 아래에서, 동북부의 3천만 동포는 굴욕적인 망국 노예 생활을 보냈던 것이었다》
(사토 가즈오 佐藤和雄)
■ 한국 - 『세계사』에서 3줄 만 기술
한국에서 자국사를 다루는 『국사』는 국정 교과서이다. 만주 사변이나 ‘만주국’에 관해서는 국사에서는 다루지 않고, 세계사를 가르치는 『사회 2』에서 설명하고 있다. 발행 부수가 가장 많은 금성출판의 교과서를 보면, ‘전체주의와 제2차 세계 대전’이라는 항목에서 다루고 있으며, 역사의 큰 흐름 안에서 평가하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3줄 정도의 기술로, 다음과 같이 ‘만주국’은 등장하지만, 만주 사변이라는 말은 나오지 않는다.
《일본에서는 군부가 정권을 잡고 침략 전쟁을 감행하는 등 군국주의 체제를 강화했다. 일본은 만주를 점령하여 만주국을 세운 후, 중일 전쟁을 일으켰다》
집필자가 취재에 응해준 디딤돌출판의 교과서에서도, 일본 침략의 모습을 보여주는 지도를 싣고 만주국도 표시되어 있었지만, 만주 사변에 대한 설명은 없었다.
김육훈(金陸勲) 태릉고교 교사는 “교과서는 지면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역사의 큰 흐름을 잡을 수 있도록 가르치는 것이 중요하다. 이 시대는 제국주의와 파시즘에 대항해 여러 민족들이 어떻게 싸웠는지에 중점을 두었다”라고 집필한 의도를 밝혔다.
고교 『세계사』교과서에서는 중학교 보다 설명이 자세해 졌고 ‘만주 사변’이라는 표현도 나온다. 금성출판 교과서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일본은 장 제스(蔣介石)가 북벌을 진행하는 동안 세차례나 산동(山東)에 출병하여 방해하였고 만주 사변을 일으켜 중국 북동부를 점거한 뒤 괴뢰 정권(만주국)을 세웠다》
한국 역사에서 보면, ‘만주(満州)’는 항일 독립 운동의 거점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이런 관계로, 국사 교과서에서는 만주 사변에 대한 설명은 없어도 “독립전쟁은 만주와 중국 본토를 근거지로 하여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끊임없이 전개되었다” “일제의 중국 침략이 거세어지면서 만주(満州) 지역 독립군 활동은 크게 제약을 받게 되었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사쿠라이 이즈미 桜井泉)
■ 대만 -‘위만주국(偽満州国)’ 이 ‘만주국’으로
대만 교과서에서는 만주 사변과 만주국에 대해서 중국사 외에 세계사에서도 유럽 전선에 호응한 일본의 중국 침략의 일환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널리 사용되고 있는 남일서국(南一書局)의 『국민 중학 사회』에서는 ‘10년 건설기의 내우 외환’이라는 항목에서 1 페이지를 할애하고 있다. ‘10년 건설’이란 장제스(蔣介石)에 의한 북벌 통일의 완성으로부터 항일 전쟁이 일어날 때까지의 1928~37년을 가리킨다. 교과서에서는 ‘10년 건국’ ‘황금의 10년’이라고도 부르고 있다. 그 사이의 ‘내우’란 공산당의 세력 확대이며, ‘외환’이란 9•18 사변(대만에서의 만주 사변 호칭)을 가리킨다. 주된 기술은 다음과 같다.
《일본이 선양(瀋陽)성을 포격한 것이 9•18 사변이다. 다음 해, 일본은 동북 지방 전역을 점령하고, 퇴위한 청 황제 푸의(溥儀)를 옹립하여 만주국을 만들어, 괴뢰 정권으로서, 중화를 가지고 중화를 제압하는 정책을 실시하였다》
또한, 세계사에서는‘제2차 세계대전’의 ‘조사 학습’항목에서 《일본은 1931~37년 사이에 어떻게 중국 침략을 실시했는지 생각해 보자》라는 과제를 던지고 있다.
예전의 대만 교과서나 현재의 중국 교과서와 비교해 두드러진 차이가 나는 것은, ‘만주국’에 대한 표기이다. 1983년의 ‘역사 과정 표준’에 근거한 교과서에서는 ‘위만주국(偽満州国)’으로 표기되어 있었지만, 현재는 ‘위(偽 가짜)’라는 표기는 사라졌다.
남일서국(南一書局)의 교과서 편집 지도위원인 초호이민(周恵民) 정치대학 역사학부 교수는 “9•18 사변은 일본의 중국 침략의 시작으로서 중요한 사건이지만, 국민당은 만주국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교과서에서의 기술은 적었다”라고 설명했다.
현재의 교과서에는 푸의(溥儀)가 일본의 군인과 고급관료에 둘러싸인 기념사진도 소개하며, ‘만주국’이라는 타이틀이 붙어 있다. 초(周) 교수는 “1933년에는 많은 대만인이 만주국으로 돈 벌이를 떠났다”라고 말하며, 대만의 역사로 봐도 만주국의 존재가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다무라 히로쓰구 田村宏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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