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혁 20년’ 동유럽을 가다]<3>‘체제 전환의 모범’ 체코

  • 입력 2008년 1월 16일 02시 58분


‘프라하의 봄’ 무대에서 도약의 중심으로1968년 체코슬로바키아 민주화운동 ‘프라하의 봄’의 중심 무대였던 바츨라프 광장. 프라하의 봄은 짓밟혔지만 그날의 뜨거운 열정은 20여 년 뒤 무혈 ‘벨벳 혁명’을 통한 매끄러운 체제 전환을 이끈 원동력이 됐다. 프라하=김영식 기자
‘프라하의 봄’ 무대에서 도약의 중심으로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 민주화운동 ‘프라하의 봄’의 중심 무대였던 바츨라프 광장. 프라하의 봄은 짓밟혔지만 그날의 뜨거운 열정은 20여 년 뒤 무혈 ‘벨벳 혁명’을 통한 매끄러운 체제 전환을 이끈 원동력이 됐다. 프라하=김영식 기자
공산 독재에 맞서 싸운 체코의 민주화운동은 8개월 만에 탱크를 앞세운 소련군의 군홧발에 짓밟혔다. 바츨라프 광장 한가운데 있는 기념비 앞에 그날의 희생자를 애도하는 꽃이 놓여 있다. 프라하=김영식  기자
공산 독재에 맞서 싸운 체코의 민주화운동은 8개월 만에 탱크를 앞세운 소련군의 군홧발에 짓밟혔다. 바츨라프 광장 한가운데 있는 기념비 앞에 그날의 희생자를 애도하는 꽃이 놓여 있다. 프라하=김영식 기자
외국인 투자 적극 유치… 年 6%대 고성장 질주

《체코 프라하 구시가의 중심 바츨라프 광장에서 도보로 5분 거리인 폴리티츠키흐베즈뉴 거리. 한참을 서 있어도 인적이 뜸한 이곳엔 붉은 별이 그려진 체코 공산당 깃발이 나부끼고 있었다. ‘인민과 함께, 인민을 위해’라는 플래카드와 ‘미국의 미사일방어(MD) 기지 설치 반대’라는 슬로건도 걸려 있었다. 이곳은 다름 아닌 체코 공산당 당사. 이 나라에서 공산당이 당당한 정치세력으로 남아 있음을 보여 준다. 공산당은 2006년 6월 총선에서도 시민민주당(81석), 사회민주당(74석)에 이어 26석을 차지한 제3당이다.》

체제 전환의 모범으로 불리는 체코의 수도에 냉전시대의 유물인 공산당이 옛 이름 그대로 당사를 갖고 있다는 사실이 처음엔 믿기지 않았다. 이는 체코의 체제 전환이 그만큼 평화적으로 이뤄졌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1989년 11월 베를린 장벽 붕괴 당시 ‘체코슬로바키아’에서도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고 초기에는 무자비한 시위 진압도 있었다. 그러나 시대의 변화를 깨달은 공산당은 스스로 집권 세력에서 평화롭게 퇴진하는 길을 택했다. 오늘날 ‘벨벳 혁명’으로 불리는 매끄러운 체제 전환이었다.

○ 서유럽 인접-잘갖춰진 인프라 장점

체코가 다른 체제 전환 국가와 달리 구체제 세력에 대해 관용과 포용의 모습을 보여 온 것은 경제적 자신감의 표현이기도 하다.

프라하를 떠올리는 사람들은 체코에 대해 ‘관광 국가’의 이미지만을 갖기 쉽지만 이 나라 경제에서 실제 관광산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국내총생산(GDP) 기준으로 3.5%(2006년)에 불과하다.

이규남 KOTRA 프라하 무역관장은 “체코는 수출로 일어선 나라로 자동차를 비롯한 제조업 수출이 경제의 67%를 차지한다”고 설명했다.

체코는 1995년 12월 옛 공산권 국가로는 처음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한 뒤 2005년 16억 달러의 흑자를 기록해 중동부 유럽 국가 중 최초의 무역수지 흑자국이 됐다. 2006년에도 수출 951억 달러를 기록하며 19억 달러의 흑자를 보였다.

이런 성장은 전통적인 공업국가로 오랜 제조업의 역사를 가진 배경 덕분이다. 오스트리아제국 시절엔 독일어권 오스트리아보다 공업화가 앞서 ‘제국의 공장’으로 불렸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독일 전투기의 대부분을 생산했고 공산화 이후에도 공산권 승용차의 명가였던 ‘스코다 자동차’ 등으로 명성이 자자했다. 이 회사는 1991년 4월 독일 폴크스바겐과 합병했다.

물론 체코도 체제 전환 초기부터 잘나간 것은 아니다. 외국 기업에 별도의 투자 인센티브를 부여하지 않은 탓에 1997, 98년 외환위기를 맞아 경제가 침체되고 정권이 교체되는 진통을 겪은 뒤 뒤늦게 ‘투자인센티브법’을 도입했다. 현재 외국인 투자 기업들은 2005년 기준 체코 총제조업 수출의 60%를 담당하며 6%대에 이르는 고성장을 이끄는 체코 부흥의 견인차다.

독일을 비롯한 서유럽 국가들과 국경을 접한 지리적 이점, 사회주의 시절부터 비교적 잘 갖춰진 인프라스트럭처도 외자 유치에 한몫을 하고 있다.

시내 쇼핑몰에 갓난아이를 데리고 나온 토마스 코주베크(30) 씨 부부는 “체코 경제가 성장한 것도 사실이지만 아직은 임금 수준이 서유럽의 절반 정도에 불과하다”며 “더욱 내실 있는 성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 변혁에 대한 열망-두려움 공존

1968년 1월 온건파인 알렉산드르 둡체크가 공산당 서기장에 취임해 ‘인간의 얼굴을 가진 사회주의’를 표방하면서 이른바 ‘프라하의 봄’이 시작됐다. 그러나 변혁의 열망은 곧이어 들이닥친 소련군의 탱크에 짓밟혔다.

바츨라프 광장 한 편에 놓인 희생자 추모 꽃다발이 없었다면 이곳이 소련의 군홧발에 짓밟힌 역사의 현장임을 떠올리기조차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페트르 유스트 카렐대 정치학부 교수는 “손가락을 퉁기듯이 체제가 쉽게 변한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라고 잘라 말했다. 전체주의 사회에서 40년을 지낸 사람들의 생각이 하루아침에 바뀌지 않는다는 설명이었다.

대부분의 체제 전환 국가처럼 체코 국민 역시 변혁을 열망하면서도 개인의 책임을 강조하는 체제에는 두려움을 느끼는 ‘이중 감정’으로 인해 좌우파 정권 교체라는 통과의례를 거쳤다.

연립정부 내 정당 간 분열과 부패 스캔들로 내각이 사퇴한 지 6개월 만에 치러진 1998년 6월 선거에서 사회주의 계열의 야당 체코사회민주당이 32.3%를 득표해 집권했다. 2006년 총선에서 우파 시민민주당이 집권한 뒤엔 시민민주당과 기독민주연합의 연정이 구성됐다.

유스트 교수는 국가가 모든 것을 관리해 주던 체제에 적응한 이들이 갑자기 개인 책임의 무한 경쟁사회에 적응하는 게 쉽지 않아 아직도 사회 각 부문의 발전을 더디게 하고 있다며 “전체주의 시기의 두 배가 넘는 시간이 지나야 모든 국민의 사고방식이 바뀔 것”이라고 전망했다.

프라하=김영식 기자 spear@donga.com

▼“체제전환 초기에 시행착오 투자유치로 변화 동력 얻어”▼

“국제사회의 지지와 해외 자본 유치가 가장 중요합니다.”

장래 북한의 체제 변화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체제 전환 초기에 가장 필요한 것’을 묻자 루보미르 리살 체코정치경제연구소(CERGE-EI·사진) 소장은 이같이 답했다. ‘해외 투자 유치야 말로 기업과 산업 전반에 가장 큰 파급효과를 낳을 수 있다’는 것이 체코인들이 제일 먼저 들려주고자 하는 경험이었다.

―체제 전환 20년간 체감한 변화는 어떤 것인가.

“눈에 띄는 가장 큰 변화는 3, 4년이 지날 무렵 나타났다. 관계 법령 정비, 기업의 스타일 변화는 물론이고 개인의 사고방식까지 변화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다만 실질적인 효과는 은행 등의 사유화가 마무리된 2000년 무렵에야 나타나기 시작했다.”

―체제 전환의 시행착오와 여기서 얻은 교훈은 무엇인가.

“자본주의적 변화로 이끌 자산이 부족해 처음엔 변화의 추진력을 갖지 못했다. 그렇다 보니 1997년 외환위기로 세계 경제가 흔들릴 때 어려움이 가중됐다. 정부가 은행 사유화를 비롯해 해외 투자를 장려하는 법령을 정비하는 등 정치적인 결단을 내린 뒤에야 비로소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체코가 안정적으로 체제 전환을 마무리할 수 있었던 배경은….

“정부가 뒤늦게나마 적극적으로 해외 투자 유치에 나섰기 때문이다. 유럽연합(EU) 통합을 미리부터 준비한 것도 도움이 됐다. 체코는 EU 가입 전부터 충분한 준비 기간을 거쳐 사실상 통합이 이뤄진 뒤 회원국 가입이라는 형식적인 절차만을 거쳤던 셈이다.”

―EU와의 진정한 통합에는 유로존(Euro zone) 가입 문제가 남아 있는데….

“유로화 가입은 피하고 싶다고 피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다만 현재 경제가 안정된 상태이고 체코 코루나가 유로화에 강세를 보이는 시점이어서 굳이 서두를 필요가 없다. 특히 EU가 요구하는 재정적자 조건(GDP 3% 미만)을 맞추기 위해서는 연금과 의료보험 등 복지정책에 손을 대야 하는 정치적 문제가 걸려 있다. 따라서 여러 측면을 고려해 장기적으로 결정해야 한다는 게 현재의 결론이다.”

―개인적으로는 체제 변화가 어떤 의미였나.

“체제 변화 덕택에 내가 원하던 경제학을 전공할 수 있었다. 공산당의 계획과 명령에 따라 인생이 정해졌던 과거와는 달리 내가 원하고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는 사회가 된 점이 가장 행운이었다. ‘행복은 자기가 찾는 것’이라는 체코 속담처럼 말이다.”

프라하=김영식 기자 spea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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