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 세진 러시아 “이제 중동으로”

  • 입력 2008년 1월 31일 02시 58분


외무차관 “걸프만 안보 개입”… 美와 힘겨루기

냉전 시절이던 1988년 2월 8일 옛 소련 크림반도 앞바다에선 소련 호위함 베자베트니가 흑해 연안을 지나던 미국 구축함 요크타운을 들이받아 순항을 저지했다. 미국의 소련 영해 침범 사건이었지만 당시 미하일 고르바초프 공산당 서기장은 대미관계 개선을 의식해 사건을 더 확대하지 않고 조용히 마무리했다.

그로부터 약 20년이 지난 2008년 1월 28일 알렉산드르 살타노프 러시아 외교부 차관은 바레인에서 열린 국제회의에서 “걸프 만 지역의 집단 안보 문제를 본격 거론하겠다”고 선언했다. 오일 달러로 힘을 키운 러시아가 중동 지역의 안보 문제에 적극 개입할 의사를 밝힌 것이다.

▽진입 문턱이 낮아진 중동 지역=과거엔 옛 소련의 중동 진출은 꿈에 불과했다. 1981년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공산당 서기장은 걸프 만에서 이해 당사국이 참여하는 안보회의를 소집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실현되지 않았다.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중동 산유국들이 소련을 멀리하는 대외 정책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소련은 흑해에서 중동으로 가는 길목인 시리아에 군사기지를 운영하는 선에서 만족해야 했다.

하지만 냉전이 끝나고 오일 머니를 비축한 러시아에 중동으로 진입하는 문턱은 한층 낮아졌다. 이라크전쟁으로 미국의 중동 정책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이슬람 국가들은 러시아의 진출을 반기는 형국이 됐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이런 정세를 십분 활용해 지난해 2월 사우디아라비아 카타르 요르단을 차례로 순방하며 중동으로 가는 길을 닦아 놓았다.

▽냉전보다 치열한 중동의 미-러 대결=러시아 외교부는 지난해 3월 “미국의 힘이 빠진 중동 지역에 안보 균형을 유지할 필요가 있다”며 중동 문제 개입 의사를 분명히 했다.

러시아 국영 회사들도 중동 산유국들과 각종 계약을 체결하며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있다. 러시아 최대 국영가스 회사인 가스프롬은 중동 국가들과 ‘천연가스 카르텔’ 설립 문제를 협의 중이다. 영국 왕립군사연구소의 마크 스미스 연구원은 “러시아의 중동 정책은 미국의 대체 세력으로서 러시아의 힘을 부각시키면서 미국과 경쟁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앞으로 양국 간 외교 경쟁과 군사 대결이 냉전시절보다 치열해질 수 있다는 것이 서방 전문가들의 예상이다.

모스크바=정위용 특파원 viyonz@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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