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보다 먼저 포로로 잡힌 병사들이 모두 석방되기 전에 나만 혼자 풀려날 수는 없다."
2008 미국 대선 레이스에서 공화당 후보의 자리를 사실상 굳힌 존 매케인 상원의원을 유명하게 만든 말이다.
2004년 대선의 존 케리 민주당 후보와 마찬가지로 베트남 전쟁 영웅 출신이지만 케리가 1970년대 반전운동에 앞장서며 정치인으로 성장한 것과 달리 매케인은 '미국의 결정'을 존중하고 옹호해왔다.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모두 해군제독인 명문 군인 가문 출신인 매케인은 해군조종사로 베트남전에 참전했다. 1967년 10월 하노이 인근 발전소 폭격을 위한 출격을 했다가 지대공 미사일을 맞고 격추돼 팔다리가 부서진 채 낙하산에 매달려 인근 호수에 빠졌다.
매케인을 심문하던 베트콩 측은 그가 해군 고위 지휘관의 아들임을 뒤늦게 알고 병원으로 옮겨 치료하며 그가 포로로 잡힌 사실을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이듬해 매케인의 아버지가 태평양사령관에 임명되자 베트콩은 매케인을 석방시키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매케인은 '위험지역에 동료보다 먼저 들어가고 늦게 나온다'는 군인행동수칙을 내세우며 특혜 석방을 거부했다.
1968년 여름 '스파이 행위 자백'을 강요받으며 거꾸로 매달리기, 2시간 연속 구타 등 고문을 받고 치아가 대부분 부서지는 고통을 겪고 결국 반미 선전문과 간첩행위 자술서에 서명하기도 했다. 뒷날 그는 "누구나 무너지고 마는 한계점이 있음을 배웠다"고 토로했다.
1973년 3월 파리평화협정에 따라 석방돼 뉴욕타임스 1면에 귀환 사진이 실릴 정도로 전쟁영웅 칭호를 받으며 돌아왔다. 하지만 그 사이 아내는 교통사고를 당해 키가 10cm 가량이나 줄어들 정도로 시련과 고통을 겪은 뒤였다. 머리가 하얗게 셀 정도로 몸이 쇠약해진 매케인 자신도 전쟁 부상 회복에 급급하느라 진급이 멈췄고 가정생활은 불화를 겪었다.
매케인은 1979년 해군 리셉션장에서 만난 18세 연하인 미모의 교사 출신 신디 헨슬리와 사랑에 빠졌고 결국 부인과 이혼했다. 그는 훗날 "첫 결혼의 실패를 전쟁이 남긴 상처 탓으로 돌리는 건 비겁한 일이다. 나의 이기심과 미성숙함이 문제의 원인이다"며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다.
두 번째 부인의 처가는 애리조나에서 맥주 판매상으로 거부를 축적한 집안이었다. 1981년 군 생활을 접은 매케인은 처가의 지원으로 애리조나에서 연방 하원의원에 도전해 정치에 입문하고 이어 상원의원으로 승승장구해왔다.
'극한상황에서도 동료를 앞세우고 자신의 약점과 잘못마저도 솔직히 인정하는 명예를 아는 남자'라는 이미지는 매케인의 최대 장점이 됐다. 2000년 공화당 대선 후보 경쟁에 뛰어든 그는 그런 이미지에 힘입어 조지 W 부시 후보와 치열한 선두다툼을 벌였다.
그러나 그에겐 '독불장군'이란 수식어도 따라다닌다. 특히 동료 공화당 상원의원들 사이에선 친구가 거의 없을 정도다. 그는 옳지 못하다고 판단되는 법안을 제출한 의원을 면전에서 거친 언사로 대놓고 비판해왔다. 릭 센토룸 전 상원의원은 "의원들 중 매케인과 한판 벌이지 않았던 사람이 없을 정도"라며 그가 대통령이 되면 의회 공화당 지도부의 협조를 받기가 어려워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매케인이 후보로 확정되면 골수 보수파들은 아예 버락 오바마 지지로 돌아설 것"이라는 주장도 나온다.
물론 매케인에 대한 공화당 내부 보수파의 공격은 불법이민, 감세, 정치지금 개혁 등의 이슈에서 그가 공화당 보다 오히려 민주당 쪽에 가까운 정책을 주도해온 영향도 크다. 때문에 그는 '매버릭(maverick·무소속, 무당파)'으로 불린다.
하지만 매케인의 정책 성향은 실제론 상당히 보수적이다. 미국 보수주의연맹(AMU)의 의원 이념 척도 분석에 따르면 매케인은 82점(100점에 가까울수록 더 보수적)이었다. 그는 이라크전쟁 상황이 최악이어서 여론이 압도적으로 미군 철군을 요구하던 2005~2007년 상반기에도 철군에 강력히 반대했다. 총기소유, 자유무역, 사형제 등 쟁점에서도 공화당의 정책을 강력히 지지해왔다.
그는 2001~2000년엔 '가장 리버럴한 공화당 상원의원'을 뽑는 조사에서 6위에 선정됐지만 최근의 투표기록은 가장 보수적인 의원 순위 2위를 기록했다.
72세의 고령인 그는 1990년대부터 2002년까지 피부암으로 고통 받기도 했다. 유난히 창백한 얼굴도 햇빛에 노출되지 말라는 의사의 지시가 영향을 미친 것이다. 얼굴 왼쪽엔 눈에 띄는 수술 흔적이 남아 있다. 스스로 "나는 먼지 보다 더 오래됐고 프랑켄슈타인보다 더 상처가 많다"고 자조할 정도다. 전쟁 때의 부상 후유증으로 팔을 어깨 위로 올리지 못하고 빗질도 남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연설 제스처도 어색하고 목소리에도 힘이 없다.
소신을 지켜온 험난한 인생 역정에서 비롯된 그 같은 신체적, 외형적 약점이 그동안은 유권자들에게 점수를 딴 요인이었지만 실제로 대통령을 선택하는 단계에선 '국가 지도자로서 건강에 문제가 있을 수 있다'는 불안감을 자극하는 요인이 될 소지도 있다. 그는 그 점을 의식해 구순이 넘은 노모가 유세장에 동행하며 모자의 건강을 과시하기도 한다.
한반도 정책과 관련해 그는 지난해 말 포린어페어스에 기고한 외교정책 공약에서 "북한은 주민을 굶기는 전체주의 정권이다. 북한이 비핵화를 실제로 약속한 건지 불분명하다. 북-미 수교를 위해선 북한의 미사일 문제와 일본인 피랍문제, 테러와 핵 확산 문제가 먼저 고려되고 해결되어야 한다"고 밝혔다.
그는 또 "대통령이 되면 한국과의 안보 경제 협력을 강화함으로써 그동안 마찰을 빚어온 한미관계를 재건하겠다" "한국과의 자유무역협정의 잠재력을 완전히 실현해야 한다"는 언급을 했다.
워싱턴=이기홍특파원 sechep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