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바람이 부는 영하 7도의 추위에도 불구하고 1km가 넘는 긴 줄이 늘어서 있었다. 대통령선거 민주당 예비후보인 버락 오바마 상원의원의 연설회장에 들어가려는 인파였다.
사람들이 모두 센터에 들어선 것은 정오가 다 돼서였다. 3시간가량 줄을 선 끝에 들어온 이 대학 2학년 레이니 길버트(여) 씨는 흰 볼이 발갛게 얼어 붙은채 관중석 맨 끝자리를 차지하자마자 2만여 청중이 연호하는 "우리는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We can change)"란 구호를 따라 하기 바빴다.
"정말 추웠지만 오바마 후보를 볼 수 있는데 뭐가 문제이겠느냐"는 길버트 씨에게 "왜 오바마 후보에게 열광하느냐"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오바마가 당선되면 세계가 미국을 다르게 볼 거예요. 이라크전쟁도 끝나고 도청이니 '워터보딩'(물고문 논란을 빚은 테러용의자 심문기법)이니 하는 수치스러운 논란도 더는 없겠죠."
미국 대선 레이스에 몰아치는 '오바마 열풍'의 진원지는 10대 후반~20대 젊은이들이다. 예비경선 때마다 정치에 무관심했던 10, 20대 젊은이들이 몰려나오고 있다. 최근 수십 년간 보기 힘들었던 현상이다.
대학원생 릴리 메인 씨는 "2004년 선거 때도 투표권이 있었지만 유세장 방문은커녕 투표도 안 했다"며 "하지만 이번엔 오바마가 나를 불렀다"고 말했다.
실제로 아이오와 코커스(당원대회) 때 25세 이하 민주당원의 투표율은 2004년에 비해 135%포인트 증가했다.
오바마 후보는 18~29세 유권자 투표에서 아이오와에선 4 대 1, 뉴햄프셔에서는 3 대 1, 사우스캐롤라이나에서는 3 대 1, 네바다에서는 2 대 1의 압도적 차이로 경쟁자인 클린턴 힐러리 후보를 눌렀다. 오바마 후보는 젊은층을 정치 집회장으로 이끄는 동력이고, 젊은층의 지지는 오바마 후보를 선두주자로 밀어준 에너지이다.
11일 컴캐스트 센터의 열광적인 분위기는 1987년 한국 대선 당시 '민중후보'를 자처했던 백기완 씨의 유세장에서 운동권 학생들이 보여 줬던 열기를 연상케 했다.
4학년인 코리 피터슨(여) 씨는 "오바마라는 이름은 에너지이고 열정이자 비전"이라며 "이라크전쟁의 실패와 수십억 달러에 이르는 재정적자 등 조지 W 부시 행정부 7년간 정말 지긋지긋했었는데 오바마 후보의 등장은 새로운 희망을 던졌다"고 말했다.
피터슨 씨는 "지난 7년간의 세월은 젊은이들에게 희망을 갖지 못하게 한 시간이었다"며 "젊은이들이 현실에 불만이 크던 차에 오바마가 새로움, 변화, 자신감의 상징을 원하는 바람위에 올라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 바람을 읽은 듯 오바마 후보는 이날 연설에서 자신이 구상하는 희망과 변화에 대해 상세히 설명했다. 그는 "맹목적인 기대는 희망이 아니다"며 "선의만 갖고는 희망을 실현할 수 없으며 그 같은 선의가 실현될 수 있는 정치적 의지가 필요하며 그런 정치를 위해 후보로 출마했다"고 강조했다.
오바마 후보는 이라크전쟁, 환경, 교육, 복지 등 여러 주제에 걸쳐 자신이 펼칠 변화의 청사진을 설명하면서 그 방법론으로도 역시 '희망의 힘'을 강조했다. 신대륙으로 먼 바닷길을 달려온 사람들이 품었던 희망, 나치와 파시즘을 물리친 2차대전 시기 미국인들이 품었던 희망, 존 F 케네디 시절 프론티어 정신을 키우며 품었던 희망 등 희망이 현실의 변화를 가져온 힘이라는 설명이었다.
나이지리아 이민 2세인 주빌리 마칸주몰라(24·콜로라도대 재학) 씨는 "오바마 후보의 피부색이 검다는 점이 오바마 지지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지만 그보다는 오바마 후보가 내세운 통합 이미지가 나를 매료시켰다"고 말했다.
공화당원이면서도 유세장을 찾은 앤서니 루이즈(메릴랜드대 4학년) 씨는 "2000년, 2004년 선거에서 미국은 블루스테이츠(민주당 지지세가 강한 주들)와 레드스테이츠(공화당 지지 주들), 진보와 보수의 대립으로 양분되고 갈갈이 찢겼다"며 "미국을 다시 하나로 모아 주기에 가장 적합한 후보는 오바마인 것 같다"고 말했다.
이들의 정치참여 열기는 1960, 70년대 기존 질서에 도전했던 베이비붐 세대 젊은이들의 저항운동에 비해 기존 질서와 권위를 부정하지 않으면서 기존 질서 내의 개혁을 원한다는 점이 특징이다. 이들은 또 주류 매체를 통한 정보 취득 보다는 온라인을 통해 동년배들끼리 정보를 실시간으로 주고받으며 여론을 모아간다는 점도 특징이다. 어려서부터 '다양성'이란 가치를 체질화한 세대란 점도 이들이 지향하는 변화의 방향에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한 대학생은 "나는 기성세대가 미국을 세계 초대강국으로 키우고 유지해 온 업적들을 존중하고 그것을 계속 누리길 원한다"며 "하지만 부시 행정부 들어 전 세계에서 고조된 반미감정과 미국의 이미지 실추는 견딜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그는 "기존의 '부시 질서'에 가장 선명히 맞서는 후보이면서도 과격하지 않고 품위 있는 언행을 하는 엘리트이며, 분열 대신 통합을 기치로 내세운 점이 오바마가 젊은이들을 매료시킨 이유"라고 강조했다.
칼리지파크=하태원 특파원 triplets@donga.com
이기홍 특파원 sechep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