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슬림들의 나라를 만들기 위해 1947년에 인도 대륙에서 파키스탄이 세워졌다. 그러나 민주주의 꿈은 1년도 채 지나지 않아 설립자이자 첫 대통령인 무하마드 알리 진나의 죽음으로 사라지기 시작했다. 종교를 빙자한 정치 사기가 계속됐고, 군부도 국내외 정치나 전투를 통해 정치세력을 확장해 갔다. 베나지르 부토 여사가 암살당한 곳은 57년 전 파키스탄의 첫 총리인 리아콰트 알리칸이 암살당한 곳이기도 하다. 국가의 테러, 지하드의 폭력이 결백한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가고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 지하드의 자살폭탄공격은 파키스탄 사람들에게 이제는 강한 군사정권보다 민주주의가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했다.
무샤라프 대통령은 많은 독재자가 사용했던 슬로건 ‘국익을 위한’, ‘부패를 뿌리째 뽑기 위한’을 명분으로 약 5년 전 나와즈 샤리프 전 총리와 부토 여사를 강제 추방하면서 자신의 권력을 강화했다. 그는 집권기간에 경제가 나아졌고, 부패 없는 민주주의로 잘해 나가고 있다며 우방 국가에 좀 더 많은 원조를 요청했다. 서양 국가들은 그가 베일에 싸인 어떤 정치인보다 낫다며 우호적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이에 대한 국내외의 비난이 쏟아지자 우방 국가들은 무샤라프 대통령에게 부토 여사를 받아들여 좀 더 민주주의적 태도를 보이도록 압박했다. 그는 마지못해 부토 여사를 파키스탄에 다시 돌아오게 했다. 하지만 무샤라프 대통령은 샤리프 전 총리의 입국을 강제로 막았고, 대법원장을 구속해 헌법 집행을 마비시켜 파키스탄의 정치적 미래에 자신의 주장을 강력히 표시했다. 언제나 그랬듯 미국 등 우방국 지도자들은 조심스러운 침묵을 지켰다. 무샤라프 대통령은 우방 국가들에 자신의 이상적 모습을 바라기보다는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라고 경고까지 했다.
무샤라프 대통령은 지난해 12월 27일 부토 여사 암살 이후의 파장에 대한 준비가 부족했다. 살아있는 부토 여사를 다루는 것보다 죽은 부토 여사를 대하는 것이 더 무섭다는 것을 알게 됐을 것이다. 불안과 불확실성이 정치에서는 새로운 기회를 만든다. 5년 전 무샤라프 대통령은 정직하고 강한 군인이 부패한 정치인보다 낫다고 국민을 설득했고, 그의 작전은 어느 정도 성공했다.
그러나 오늘, 이 상황에서 대부분의 파키스탄 사람은 나라를 망치고 있는 야심적인 그의 군대와 정보기관보다 ‘미스터 10%’로 알려진 부토 여사의 악명 높은 남편이 더 나은 지도자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지금 이 순간 총소리가 울려 퍼지는 파키스탄에서는 무샤라프 대통령의 정치생명에 종지부를 찍는 길을 제시해야 할까, 아니면 그 반대일까. 이에 대한 답은 파키스탄 유권자들의 손에 달려 있는 것만은 아니지만 한 가지 확실한 점은 그들의 결정은 어느 쪽으로 결론이 나든 국내외에 긴 파장을 가져올 것이라는 사실이다.
알록 로이 부산외국어대 인도어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