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양두정치시대]<상>푸틴 8년의 기적, 러 살렸다

  • 입력 2008년 2월 29일 02시 56분


《3월 2일 실시되는 러시아 대통령 선거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현 러시아 대통령의 후계자로 불리는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제1부총리가 당선될 것이 유력하다. 메드베데프 부총리가 대통령에 취임하면 푸틴 대통령은 총리로 자리를 옮겨 전·현직 대통령이 권력을 배분하는 ‘양두정치(diarchy)’ 시대가 개막될 것으로 전망된다. 세계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가졌고 한반도와의 관계도 밀접한 러시아의 대선 이후 변화 전망을 시리즈로 게재한다.》

진눈깨비와 가랑비가 번갈아 내린 27일 러시아 모스크바 붉은광장 앞 국영 백화점 ‘굼(GUM)’ 외벽에는 오후 5시부터 화려한 네온등이 켜졌다.

10년 전 러시아가 모라토리엄(대외부채 지불유예) 선언을 할 당시 이 백화점은 파산 위기에 처했지만 지금은 모스크바 부자들이 몰려드는 명품 쇼핑센터가 됐다.

행인들은 “굼이 살아난 건 크렘린 덕분”이라며 손가락으로 광장 건너편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 집무실을 가리켰다.

백화점 직원 이고리 니콜라예비치(42) 씨도 “푸틴 대통령이 취임한 2000년부터 경제 성장이 탄력을 받아 백화점의 잠재 고객인 고소득층이 넘쳐나고 있다”고 말했다.

굼의 뒷골목으로 들어서자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제1부총리와 푸틴 대통령이 나란히 걷는 모습을 찍은 대형 브로마이드가 눈에 들어왔다. 이 브로마이드는 10층 건물 전면을 뒤덮고 있었다. 행인 안드레이 이바노프 씨는 “이 사진을 보면 초등학생들도 메드베데프 부총리에게 표를 던지고 싶을 것”이라고 말했다.

요즘 러시아 언론들은 하루가 다르게 높아가는 러시아인의 소득과 생활수준이 푸틴 대통령의 인기 비결이며, 그가 지명한 메드베데프 부총리의 당선 전망도 밝게 해주는 요소라고 한목소리로 보도한다.

▽크렘린도 놀란 급성장=이날 오후 7시 붉은광장에서 2km 떨어진 ‘혁명광장’역에서 지하철을 탔다. 지하철 승객 3명에게 “누구를 지지할 것인가”라고 묻자 한결같이 “결과가 뻔한데 왜 그런 질문을 하느냐”며 웃었다.

지하철 안에서 60대로 보이는 할머니가 친구에게서 걸려온 휴대전화를 받았다. 3년 전만 해도 좀처럼 보기 힘든 장면이었다. 3년 전에는 휴대전화를 가진 노인이 드물었을뿐더러 지하철 통화는 아예 불가능했다. 투자 여력이 없었던 통신회사들이 지하철에까지 통신망을 깔지 않았기 때문이다.

러시아 경제의 비약적인 성장은 크렘린 정책 집행자들도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세르게이 구리예프 러시아 신경제대학장은 “1998년 재정 파탄 이후 정부는 줄곧 예산 절약을 미덕으로 삼았다. 정부가 빈곤 퇴치에 눈을 돌린 것은 2003년부터”라고 회고했다.

경제 성장의 일등공신은 고(高)유가. 푸틴 대통령 집권 초기인 2000년 배럴당 20달러였던 국제 유가는 집권 말기인 올해 2월 100달러를 돌파했다.

원유 수출 비중이 높은 나라에서 국제 유가가 5배로 뛰자 막대한 오일머니가 국고에 쌓였다. 러시아는 지난해 원유 수출만으로 현찰 1090억 달러(약 103조 원)를 거머쥐었고 국내총생산 순위 세계 7위에 올랐다.

올해 2월 초 외환보유액은 4794억 달러를 돌파했으며 석유를 팔고 남은 돈을 적립한 안정화 기금은 1570억 달러를 넘어섰다.

▽비둘기에서 매로 변한 러시아=오일머니로 자존심을 회복한 러시아는 외교 무대에서 목에 잔뜩 힘을 주고 있다.

푸틴 대통령은 2002년까지만 해도 미국과 유럽에 우호적인 지도자로 통했다. 2002년 폴란드를 방문해 옛 소련 적군에 희생된 폴란드 저항군 묘소에 헌화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집권 2기인 2004년부터 미국과 서방의 정책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키우기 시작했다고 모스크바의 서방 외교관들은 분석한다. 막대한 오일머니가 러시아로 들어오던 때였다.

지금 러시아는 세계 2위의 군사력을 바탕으로 전략 폭격기를 태평양 공해상으로 보내는 한편, 코소보 분리 독립 절대 불가, 미국의 미사일방어 계획 반대라는 카드로 서방에 맞서고 있다.

‘비둘기처럼 날았다가 매처럼 착륙한 두 얼굴의 지도자’가 현재 서방 외교관들에게 각인된 푸틴 대통령의 인상이다.

이에 대해 안드레이 베네데이치크 주러시아 슬로베니아 대사는 “푸틴 집권 기간에 외교 정책이 근본적으로 달라지진 않았다. 오일머니 유입으로 러시아의 자기주장이 강해졌을 뿐”이라고 말했다

러시아가 언제까지 고속성장의 가도를 달리고 서방과 맞설지는 푸틴-메드베데프 양두정치의 성공 여부에 달려 있다.

일각에서는 러시아가 급성장에 따른 빈부격차와 의료 교육 연금 문제의 폭발로 혼란을 겪을 것이란 얘기가 나온다. 하지만 양두정치 시대가 열려도 지금의 성장 기조와 대외 정책이 크게 바뀌지 않을 것이란 전망도 만만치 않게 제기되고 있다.

모스크바=정위용 특파원 viyonz@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지금 뜨는 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