徐박사 미국내 활동 재조명 활발
지난달 26일 오후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시 중심가에 있는 '플레이스 앤 플레이어스 극장' 앞.
지은지 96년 된 유서깊은 극장 앞은 퇴근시간이 다가오면서 차량들로 붐빈다. 겨울비 속에 발길을 재촉하는 행인들 속에 서서 잠시 시간여행을 해본다.
89년전인 1919년, 이국만리 미국에서 공부하던 한국 젊은이들이 조국의 3·1운동 소식을 듣고 미국 독립의 요람인 필라델피아로 모여든다.
대부분 미 서부, 남부 등에서 먼길을 달려온 150여 명의 한인들은 4월 14일 이 극장(당시 이름은 '리틀 시어터·Little Theatre)에 모여 '제1차 한인 대회'(The First Korean Congress)를 연다.
사흘 동안 계속된 열띤 토론과 회의에서 '미국 정부와 민중에게 보내는 호소문'등을 채택한 한인들은 거리로 나섰다. 극장 앞에는 동양의 작은 나라 출신 청년들의 대의(大義)에 공감해 필라델피아 시가 보내준 시 악대(樂隊)가 기다리고 있었다.
시 악대를 앞세운 한인들은 '코리아 인디펜덴스 리그'(한국 독립 연맹)라고 쓰인 플래카드와 태극기, 성조기를 들고 주 의회 의사당(현 독립기념관)까지 봄비를 맞으며 11km를 행진한다.
"일본은 미국인들로 하여금 '한국 사람들은 나약하고 뼈없는 자들이어서 유모와 보호자가필요하다'고 믿게 만들려 합니다. (그에 비해) 여러분은 조직된 정부의 지원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무런 수단 방법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일본인이 갖지 못한 정당한 명분을 갖고 있습니다. 미국의 대중들 앞에 한국인의 대의명분을 진상 그대로, 신뢰할 수 있고 집요하게 전달할 수 있는 '한국독립연맹'을 구성합시다."
대회 의장인, 큰 키에 호리호리한 중년 남자가 열변을 토한다. 인근에서 인쇄업체를 운영하는 기업인이자 의사인 서재필 선생이다. 당시 그의 나이 55세.
18세때 과거시험에 최연소 장원급제하고 겨우 20세 때인 1884년 김옥균 서광범 박영효와 함께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실패해 미국으로 망명한 풍운의 인물….
최근 미국에선 서재필 선생의 미국내 독립운동을 재조명하는 움직임이 활발히 일고 있다. 그가 독립신문을 만들고 독립협회를 세운 인물이라는 건 누구나 알지만 독립운동가로서 미국에서의 족적은 상세히 알려지지 않았다. 특히 1990년대 중후반 부터 국내 일부 진보단체에서 그를 친일파, 친미파, 더 나아가 '조국을 배신한 미국인' 등으로 비난하는 주장이 나왔으나 진위를 따져보려는 노력도 별로 없었다.
그러나 재미 한인 의사들을 중심으로 설립된 서재필기념재단은 최근 서 선생의 주 활동무대였던 필라델피아 시를 중심으로 그의 발자취를 복원하는데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필라델피아에서 차로 30분 거리 떨어진 미디어 시에 있는 서 선생의 유택은 '서재필기념관'으로 꾸며졌다.
기념관 상근간사를 맡고 있는 김선호(펜실베이니아대 박사과정)씨는 "서재필 선생은 일평생 언론과 교육, 외교를 통해 근대화, 독립, 민주주의를 이룬다는 신념을 추구했다"며 "특히 남에게 의존하지 않고 경제적으로 자립해 독립운동을 해야 한다는 신념을 실천한 점도 돋보인다"고 말했다.
서 선생은 갑신정변 실패후 3족이 몰살되는 아픔을 안고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했다. 부모는 처형됐고 아내는 자살했으며 2살짜리 아들은 나라에서 굶겨 죽였다. 샌프란시스코에 함께 온 박영효와 서광범은 양반 체면에 막노동은 못하겠다며 돌아갔지만 서 선생은 막일을 하며 밤에 YMCA와 교회에서 영어를 배웠다.
독지가를 만나 동부로 건너온 그는 의대에 진학, 한국인 최초의 미국 시민권자이자 최초의 의학사(MD)가 된다. 갑오경장으로 고국에 개화의 바람이 불고 김홍집 내각은 서 선생에게 외무대신 자리를 권한다.
그러나 1895년 귀국한 그는 관직을 사양한채 "민중의 각성과 지지 없이 나라를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다"며 독립신문을 창간한다. 한글전용인 최초의 민간 신문이었다. 당시 서재필이 주창한 '독립'은 무조건적인 외세배격이 아니라 청(淸)에의 종속에서 벗어나 균형적 외교를 통해 적극적 대외협력관계를 맺자는 개념이었다.
그러나 왕실과 갈등을 빚으면서 그는 2년 4개월만에 다시 미국으로 떠난다. 창간 당시 발행부수 300부에서 3000부로 성장한 독립신문은 윤치호가 인수했으나 1899년 폐간된다.
필라델피아로 돌아온 서 선생은 "독립활동을 위해선 안정적 재정이 필요하다"며 미국인 친구와 동업해 인쇄업을 시작한다. 사업은 종업원 50명 규모로 번창했고 서재필은 이를 재정적 바탕으로 삼아 제1차 한국의회 개최, 한국홍보국 설립, 월간지 '코리아 리뷰' 발행, 워싱턴군축회의 참석 등의 왕성한 독립운동을 벌였다. 또 최초의 지한파 미국인 네트워크라고 할 수 있는 '한국의 친구 연맹'(The League of the Friends of Korea)을 만든다. 그는 또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 고국의 신문과 잡지에 꾸준히 기고하며 독립정신을 고취했다.
그러나 한 해에 사나흘도 회사에 출근하기 힘들 정도로 독립운동에 매달리고 당시 돈으로 8만 달러 이상의 사재를 털어넣는 바람에 사업은 거덜난다.
그는 62세때인 1926년 다시 의대(펜실베이니아대 의학부)에 진학해 병리학을 배워 고용의사 생활을 하다 72세에 병원을 개업했다. 광복 후 일시 귀국했다가 "통일된 조국을 위해 노력해 달라"고 당부하며 미국으로 돌아온 그는 한국전쟁 발발소식에 졸도를 했고 1951년 1월 87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서 선생이 정치, 무장투쟁이나 조직 활동 보다는 신문발행, 기고 등의 언론활동에 주력하며 독립과 개화운동에 매진한데 대해 전문가들은 "학창시절 '언론과 교육을 통해 민주주의를 구현해가는 미국의 시스템'을 체험한데 따른 것"이라고 해석한다.
현직 의사인 정환순 서재필기념재단 회장은 "서 박사의 미국내 63년 세월을 복원하면 할수록 조국의 독립과 근대화를 염원하며 외길을 걸어온 삶에 고개가 숙여진다"고 말했다.
기념재단과 필라델피아시는 서재필 선생의 뜻을 기리는 첫 기념행사를 4월 중순 공동 개최할 예정이다.
'엠버시 로우(Embassy Row)'라고 불리는 미국 워싱턴 시내 매사추세츠 아베뉴. 대사관들이 모여 있는 아름다운 거리다. 이곳의 각국 공관 앞엔 거의 예외 없이 그 나라를 상징하는 인물의 동상이 서 있다. 워싱턴 시내의 외국인 동상은 총 154개에 달한다.
이곳에 있는 워싱턴 한국 총영사관 정문 앞에 서재필 동상이 세워진다.
주미대사관은 한국과 한미관계를 상징하는 인물의 동상을 세우기로 결정하고 지난해 초부터 수십여 명의 역사 인물 리스트를 만들어 여론을 수렴, 검토한 결과 서재필 선생을 선정했다고 밝혔다.
권태면 총영사는 "서재필 선생은 평생 고국의 근대화와 독립을 염원하며 가시밭길을 걸은 선구자이며, 미주 한인 이민사에 있어 '최초'의 수식어가 여러 개 붙는 '미주 한인들의 아버지'와 같은 인물이라는데 의견이 모였다"고 설명했다.
11만 달러의 동상 건립 비용중 6만 달러는 국제교류재단이 지원하고 나머지는 미주 한인들이 부담한다는 계획으로 모금 활동을 벌이고 있다.
한국에서 제작한 2m 크기의 동상은 지난달 10일 미국에 도착했다. 이은상 선생과 이정식 펜실베이니아대 명예교수의 글이 함께 새겨진다. 동상 제막식은 일단 4월 중순 경으로 예정돼 있다.
한편 펜실베이니아주 델러웨어카운티 미디어 시의 서재필 기념관에는 지난해 1000명 가량의 관람객이 방문했다. 특히 재미 한인들이 자녀에게 고국의 역사를 알려주기 위해 많이 방문한다. 이곳은 서 선생이 독립운동에 전념하다 사업체가 파산한뒤인 1925년 필라델피아 교외로 이주해 1951년 세상을 떠날때까지 살던 집이다. 실내 전체를 전시공간으로 만들었다. 기념관 방문 예약 미국 215-276-8092, 267-467-2449.
필라델피아=이기홍특파원 sechep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