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지족 美 10대 “부모와 대화가 안돼요”

  • 입력 2008년 3월 9일 20시 21분


러셀 햄튼 씨는 미국 월트디즈니 사의 아동서적 출판부 사장이지만 정작 자신의 10대 자녀에 대해선 별로 아는 게 없었다. 지난 연말 로스앤젤레스에서 딸 케이티(14)와 딸의 친구 2명을 차에 태우고 가면서 햄튼 씨는 이 같은 사실을 절감했다.

"케이티가 뒷자리에서 친구들과 영화 주인공 얘기를 하더군요. 우리 회사에서 만든 영화 '캐리비언의 해적'의 주인공 올란도 블룸이냐고 물었지요. 그러자 10대 특유의 한숨이 나오더니 케이티가 '아빠는 너무 뒤처졌어요'라고 말하는 거에요."

머쓱해진 햄튼 씨는 아이들이 재잘거리는 소리를 멈추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어 후사경(백미러)으로 딸이 휴대전화 문자 메시지를 보내는 것을 본 그는 "친구들이 있는데 문자를 보내는 것은 무례한 일이다"고 나무랐다. 딸의 대답은 놀라웠다.

"지금 우리끼리 문자를 주고받고 있거든요. 제가 말하는 걸 아빠가 듣는 게 싫어서요."

▼첨단 통신기기로 감시망 벗어나=햄튼 씨의 경험담은 이제 미국의 일반 가정에서 벌어지는 일상이 됐다고 뉴욕타임스가 9일자 인터넷 판에서 보도했다. 옛날 10대들이 '감시자' 없이 데이트하기 위해 자동차를 활용했듯 요즘 청소년들은 부모의 감시망에서 벗어나기 위해 인터넷과 휴대전화를 이용한다는 설명이다.

아이들은 혁신을 거듭하는 휴대전화나 블랙베리와 같은 개인용 첨단 통신기기에 의존해 가족과는 거리를 두는 사회적 관계를 형성하고, 부모와의 소통 방식을 바꾸고 있는 셈이다.

신문은 "과거의 10대들이 '감시자' 없이 데이트하기 위해 활용한 것이 자동차였다면 요즘엔 인터넷과 컴퓨터, 개인통신이 이들을 부모로부터 자유롭게 만들어주고 있다"고 설명했다.

기동성을 자랑하는 휴대전화의 판매 및 활용도도 급증하고 있다. 기술의 발전과 소비 행태를 조사하는 매사츄세츠 프래밍엄의 IDC 연구소에 따르면 휴대전화를 갖고 있는 5~24세 연령대의 미국인이 2010년에는 무려 81%에 육박할 것으로 조사됐다. 2005년에는 53%가 휴대전화를 보유했다.

이동통신 수단의 사회적 영향력을 연구해온 셰리 터클 MIT 교수는 "휴대전화는 앞으로 휴대용 컴퓨터로 진화해 사회적 네트워킹을 담당할 것"이라며 "아이들에겐 자아형성 및 심리적 변화의 목적으로까지 진화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파이어플라이 통신사는 지난해 취학전 아동용의 휴대전화로 '아빠' '엄마'의 이미지를 형상화한 버튼 2개를 장착한 휴대전화 '글로우폰'을 만들기도 했다.

▼세대 간에는 장벽, 같은 세대끼리는 소통 핵심도구=개인통신 활용의 확대라는 문화적인 변화는 1960년대의 로큰롤의 출현이나 성혁명에 따라온 것과 같은 엄청난 간극의 세대 차이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수십년 전 자동차로 부모를 멀리했던 세대들이 이제 부모세대가 되어서는 따돌림을 받는 것.

한편으로 엄지족 세대는 신조어를 만들어내며 동년배들의 유대감을 만들어내고 독립성을 확인하곤 한다. 햄튼 씨 딸의 사례처럼 '부모의 눈앞에 있지만 실제로는 부모의 눈을 피하는' 사생활을 즐기고 있는 셈이다. 눈으로 보지 않고도 휴대전화 키패드를 누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미국 통신회사 AT&T는 이처럼 세대 격차에 충격을 받은 부모들을 위해 엄지족들이 주고 받는 문자 은어(隱語) 해독 지침서를 최근 내놓았다. 지침서에 따르면 'POS'는 '부모님이 옆에 있어(Parent over shoulder)'라는 뜻이고, 'PRW'는 '부모님이 보고 있어(Parents are watching)' 'KPC'는 '부모님 모르게 해야 돼(Keeping parents clueless)'의 줄임말이다.

▼부모와 전화는 No, 문자는 OK=문자세대의 새로운 특징 중 하나는 아이들이 부모와 문자로는 소통하지만 전화하는 것은 꺼린다는 것. 오레건의 포틀랜드에서 식당을 경영하는 존 펜스 씨도 "딸이 전화를 받지 않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딸로부터 문자 보내는 방법을 배웠다"고 말했다.

그의 딸 사반나는 "하루에 두세번 아버지에게 문자를 보낸다"며 "그렇지만 아빠가 문자로 답하는 속도가 워낙 늦기 때문에 절대로 아빠에게 문자로 뭔가를 질문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펜스 씨는 딸의 문자 메시지에 기껏해야 'OK'라는 대답을 보내곤 한다.

매리 갤릭(여) 씨는 최근 아들과의 통화가 이뤄지지 않자 '전화기를 켜줘서 고맙다'(NICE OF YOU TO TURN ON YOUR PHONE)는 내용의 문자를 남겼다. 그러나 '대문자로 문자를 보내면 소리를 지르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얘기를 듣곤 기겁했다.

한편으론 이런 문자세대의 소통이 과거 전통적인 전화통화보다 훨씬 더 자주 소식을 전하는 수단으로 변하기도 했다. 다른 지역의 대학에 다니던 자녀들은 일주일에 한 두 번만 전화를 해도 서로 반갑게 느꼈지만 이젠 하루에 두세번 문자를 보내기 때문에 오히려 더 많은 소식을 전할 수 있다는 것.

햄튼 씨는 최근 케이티가 친구들과 e-메일을 좀더 쉽게 주고받기 위해 블랙베리를 사달라고 했다고 전했다. 그는 딸에게 "그런게 무슨 필요가 있냐"고 말했지만 곧 생각을 바꿀지도 모른다고 했다.

문자 전송이 한편으론 부모와의 간극을 만들어내지만, 오히려 자식과의 단절을 피하고 좀더 소통하길 바라는 부모들이라면 문자 보내는 것을 제대로 배워야 하는 시대가 온 셈이다.

김영식기자 spea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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