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우디 여성들의 노예 같은 삶

  • 입력 2008년 4월 23일 03시 01분


간단한 병원 치료-지방 여행도

‘보호자’ 남성 허가 없인 불가능

“법정에서 여자 목소리가 들리는 것이 수치스럽다는 이유로 판사가 증언을 허락하지 않았어요.”

“의사가 남편의 허가증을 받아올 때까지는 치료를 할 수 없다고 버텼어요. 아주 간단한 염증이었는데도 말이죠.”

국제인권단체 휴먼라이츠워치(HRW)가 21일 사우디아라비아 여성 109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여성인권 실태 보고서를 발표했다. HRW의 홈페이지에 공개된 ‘영원한 미성년자’라는 제목의 이 보고서는 이 단체가 10년간의 시도 끝에 사우디 정부의 허락을 받아 처음 진행한 조사 결과다.

보고서에 따르면 사우디 여성들은 학업이나 취직은 물론 자녀와의 여행, 계좌 개설, 병원 치료, 비행기 탑승에 이르기까지 이른바 ‘보호자(guardian)’인 남성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여학생들은 아버지나 오빠가 데리러 오지 않으면 학교를 떠날 수 없고 의사나 변호사 같은 전문직 여성들도 남성 운전자 없이는 출근을 할 수 없다.

40세의 한 이혼 여성은 ‘보호자’인 전남편의 허락을 받지 못해 비행기 탑승을 거부당했다. 결국 그의 아들(23)이 허가증에 사인해 주기 위해 먼 지방에서 올라와야 했다.

여성들이 수도 리야드의 공공도서관에서 책을 빌리려면 전화로 주문한 뒤 남성을 보내 찾아와야 한다. 여성 전용 공간이 없는 기관에는 출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총선에서 여성 전용 투표소가 없다는 이유로 여성들이 선거권을 빼앗긴 사례도 있다.

중동에서도 가장 보수적인 나라로 꼽히는 사우디는 이슬람법 ‘샤리아’를 엄격히 적용하고 있다. 올해부터 여성들이 혼자서 호텔 출입을 할 수 있도록 하는 등 일부 남성 보호자 규정을 폐지했지만 깊은 관행에 묻혀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다.

인터뷰에 응한 한 사우디 여성은 “남성의 소유물이나 마찬가지인 상황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이 보고서는 “사우디 여성들은 서구의 어린이보다 못한 법적 권리를 누리고 있다”며 “사우디 정부가 잘못된 정책으로 인한 인권침해를 바로잡지 않는 한 여성들의 발전을 기대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이정은 기자 light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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