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이면 인적 끊겨 도시가 사라질것” “중학교 학생 1800여명중 30명만 살아남아” 시체썩는 냄새 진동… 해지면 유령의 도시 軍구조활동도 중장비 크게 부족 기진맥진
중국 지진 대참사로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낸 쓰촨(四川) 성 몐양(綿陽) 시 베이촨(北川) 현. 손꼽히는 절경의 계곡 안 깊숙이 자리 잡은 아름다운 도시는 사라지고 없었다. 그곳은 절망과 한숨이 가득한 아수라장으로 변해 있었다.
16일 어렵사리 찾은 베이촨 현은 폭격을 맞은 전쟁터를 방불케 해 건물들의 형체조차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였다.
5층짜리 베이촨 현 정부종합청사는 마치 눌린 시루떡처럼 폭삭 내려앉아 있었다. 시내 번화가인 위룽(禹龍)가 양편 건물들은 모두 무너져 건물 잔해와 가구, 옷가지 등 쓰레기 더미가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베이촨 현은 시가지를 휘감아 도는 젠장허(W江河)를 사이에 두고 양편에 경사가 40∼60도에 이르는 가파른 산으로 둘러싸인 인구 16만 명의 계곡 도시. 소수민족 창(羌)족의 자치현이다.
하지만 계곡에서 쏟아진 바위들이 시내를 덮쳐 거대한 장애물이 됐다. 위룽가는 동쪽 산등성이에서 지름 1∼8m의 거대한 돌무더기가 굴러 내려와 거리 군데군데가 막혀 있었다.
위룽가 양편에는 건물 더미에서 막 찾아낸 시체들이 비닐 백에 싸여 즐비하게 놓여 있었다. 가족의 신원 확인을 위해 아직 천에 싸지 않은 시체도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10세 아이부터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시체들은 피투성이였고 형연할 수 없이 처참한 몰골이었다. 여기저기 부러졌고 사지가 온전한 시체는 거의 없었다.
낮 기온이 28도까지 올라가는 무더운 날씨에 바람도 불지 않는 매우 습한 상태라 시체들의 부패한 냄새가 진동해 사람들은 모두 입마개를 하고 다닌다. 재난 후에 뒤따르는 ‘제2의 재앙’ 전염병 확산은 시간문제로 보였다.
베이촨중학교는 거대한 돌덩이에 완전히 매몰돼 현지 주민이 알려주지 않았다면 이곳이 학교라는 사실을 알아챌 수도 없을 정도였다. 재학생 1800여 명 중 30명, 교사 3명만이 살아남았다고 인근 주민은 전했다.
시내 중심가의 3∼7층짜리 아파트 건물은 대부분 풀썩 주저앉아 있었다. 무너진 아파트에는 방금까지 사람이 살았다는 것을 보여주듯 가구와 책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일부 아파트는 곧 쓰러질 듯 기울어져 있었다. 여진이라도 강타하면 온전치 못할 터였다.
물론 베이촨 현에서도 복구 작업은 시작됐다. 불도저 등 중장비 수십 대, 인민해방군 수천 명, 민병대원들이 나와 도로를 복구하고 건물 더미에서 시체를 찾아내면서 생존자를 구출하고 있었다. 하지만 굴착기 하나 변변히 없어 모든 것을 사람 몸으로 때우는 식이었다.
전기와 수도가 모두 끊어진 베이촨은 밤이면 ‘유령의 도시’로 변한다. 주민들도 더 버틸 수가 없어 정든 고향을 등지고 일제히 다른 도시로 떠나고 있었다.
한 주민은 “내일이면 인적이 완전히 끊어진 폐허가 될 것”이라며 “지도 위에 베이촨은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라고 한숨지었다.
가족과 함께 어디론가 향하던 탕쭝화(唐宗華·42) 씨는 “지진 발생 당시에 현 정부 별관인 체육국에서 체육을 가르치고 있었다”며 “종합청사에 있던 동료직원들은 대부분 숨졌다”고 말했다.
탕 씨는 “취산(曲山)초등학교 앞 문구점에서 가게를 보고 있던 장모가 지진으로 숨졌고 초등학교도 무너졌다”고 말했다.
베이촨에 이르는 길 역시 전쟁터와 다름없었다.
몐양 시에서 베이촨으로 가는 도로 54km 구간 중 34km는 도로 곳곳이 산에서 쏟아져 내려온 돌덩이와 토사로 끊어졌다. 군데군데 갈라졌고 심지어 도로가 동강나거나 떡시루 밀어내듯 한쪽으로 밀려난 곳도 있었다. 결국 차로 진입할 수 없어 현지인이 운전하는 오토바이 뒷자리에 타고 30km를 달려갔다.
산사태로 모든 길이 막힌 4km 계곡 구간을 걸어서야 겨우 베이촨에 도착할 수 있었다. 피란민들은 계곡을 따라 베이촨에서 끊임없이 줄지어 나오고 있었다.
봇짐을 지거나 머리에 인 사람, 아이를 업고 나오는 사람, 지팡이를 짚고 힘겹게 발을 옮기는 노인, 사람들과 함께 몰려나오는 길 잃은 가축들…. 6·25전쟁 당시 피란민 행렬을 연상케 했다.
베이촨을 빠져나오던 저우윈쥔(朱云軍·42) 씨는 “이제야 노모를 모시고 몐양의 피란민 구조센터로 가고 있다. 이부자리와 옷가지 등을 겨우 챙겨 나왔다”고 말했다.
이들은 그동안 너무 울어서 슬픔을 표현할 힘도 잃은 듯 하나같이 무표정했다. “가족과 친척이 죽었다”고 말하면서도 이미 눈물이 말라버렸는지 울먹이는 사람은 없었다.
이들의 원망과 슬픔을 알기라도 하는 듯 베이촨 사이를 흐르는 너비 20∼30m 젠장허의 맑고 푸른 물은 그저 고요히 흐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