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진 지옥’서 5박 6일… 한국인 유학생 5명 극적 생환기

  • 동아일보
  • 입력 2008년 5월 19일 03시 01분







“산 무너지며 바위 세례… 미친 듯 달렸다”

“산이 무너지면서 집채만 한 바위가 비 오듯 쏟아졌다. 마치 우물 안에 갇힌 채 쏟아져 내리는 돌덩이를 맞는 형국이었다.”

중국 쓰촨(四川) 성을 뒤흔든 지진 당시 진앙인 원촨(汶川) 현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 돌아온 톈진외국어대 유학생 백준호(24) 씨는 18일 청두(成都)의 김일두 한국총영사 관저에서 동료 학생 4명과 함께했던 기적 같은 생환기를 들려주었다.

“12일 오후 2시경 원촨 현 워룽(臥龍) 판다보호구역을 관광하고 7인승 렌터카에 올라 잉슈(映秀) 진으로 갈 때였다. 우르릉 하는 소리와 함께 땅이 울렁거리더니 갑자기 커다란 바위들이 굴러 떨어지고 우리가 탄 차는 3m 아래 계곡으로 굴렀다. 정신없이 빠져나와 쏟아지는 바위를 피해 급경사로 1∼2km를 미친 듯이 내달렸다. 평평한 공터의 큰 바위 옆에 대피해 있던 주민 3명을 보고 우리도 그곳에 숨었다. 하지만 돌덩이가 계속 떨어지는 데다 운전사가 생각나 다시 사고 현장으로 올라갔다.”

―중국인 운전사는 숨진 것으로 아는데….

“운전사가 운전대와 좌석에 끼여 엄청난 피를 흘리며 신음하고 있었다. 손으로 잡아끄니 피가 솟구쳐 나왔다. 운전사를 살리려고 칼로 좌석 아래 시트를 잘라냈지만 그를 도저히 꺼낼 수가 없었다. 바위가 굴러 떨어지는 와중에 운전사를 살리려고 2시간 동안 사투를 벌였지만 운전사가 의식을 잃은 데다 이러다가는 우리도 모두 죽겠다는 생각에 그를 포기하고 다시 산길을 뛰어오르기 시작했다.”

―어떻게 주민들에게 발견됐나.

“산 위로 오른 지 30분 정도 지났는데 반대쪽에서 주민들이 불렀다. 징검다리를 건너니 댐 근처에 조그만 민가가 나왔다. 지진으로 집이 날아가 주민들은 큰 바위 옆에 임시 천막을 치고 부상자를 돌보고 있었다. 사지가 멀쩡한 사람들에겐 천막조차 없었다. 저녁이 돼 폐가를 찾아 들어갔는데 여진으로 집이 무너지는 바람에 급하게 빠져 나왔다.”

―구조대에 발견된 경위는….

“그날(12일) 밤부터 14일까지 주민들과 함께 노숙을 했다. 너무 추워서 종이를 끌어 모아 불을 피우다 그것도 모자라 중국 돈과 학생증까지 태웠다. 그동안 여진은 계속됐다. 15일 아침 깨보니 댐 수위가 갑자기 높아져 있었다. 이대로는 수몰될 것 같아 오전 10시경 주민 15명과 대피했다. 3m 높이의 댐을 밧줄로 오르고 15km의 험한 산길을 15시간 걸어서 ‘폭포산장’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하루를 묵은 뒤 다른 이재민 30여 명과 함께 50여 명이 16일 오전 6시 출발해 낮 12시 넘어 잉슈 진에 도착했다. 중국 구조대를 보니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군 위성전화로 가족들과 처음 통화했다. 기상 악화로 헬기가 뜨지 못해 17일 오후 2시간쯤 걸어서 댐 호수로 나와 배를 타고 두장옌(都江堰)을 거쳐 오후 9시경 차량으로 청두에 도착했다. 인민해방군 의료진 부대에서 하룻밤을 지냈다.”

―그동안 먹을 것은 어떻게 해결했나.

“처음 만난 주민들이 쌀죽을 나눠 줬고, 탈출 과정에서 만난 중국인들도 먹을 것을 줬다. 잉슈 진의 무장경찰 구조대는 음료수와 컵라면 등 먹을 것과 치료약을 한 아름 안겨줬다. 이재민이 많았는데 구조부대 간부가 우리들이 먼저 탈 수 있도록 배려한 뒤 안내자로 병사 3명을 붙여줬다.”

5명 항공편으로 톈진행

백 씨는 “앞으로 119구조대에 자원해 생명을 구해준 분들께 보답하고 싶다”며 구조에 도움을 준 사람들에게 고마움을 표시한 뒤 “평소 산을 좋아했지만 앞으론 절대 산에 오르고 싶지 않다”고 진저리를 쳤다. 백 씨 등은 이날 오전 톈진외국어대에서 청두로 날아온 중국동포 교수와 휴식을 취한 뒤 밤 항공편으로 톈진으로 돌아갔다.

청두=하종대 특파원 orionh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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