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용하 교수 “독도가 한국땅일 수밖에 없는 이유”

  • 입력 2008년 7월 14일 12시 06분


신용하 서울대 명예교수. 동아일보 자료사진
신용하 서울대 명예교수. 동아일보 자료사진
일본이 교과서 새 학습지도요령 해설서에서 독도가 일본 영토임을 표기하려는 움직임을 놓고 한 일 양국의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

과연 일본은 어떤 근거로 독도를 일본 영토라고 주장하는가. 그 허구성은 무엇인가. 또한 왜 독도는 한국 땅일 수 밖에 없는가. 독도연구에 매진해 온 신용하 서울대명예교수에게 일본 주장의 허구성과 독도가 한국 땅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알아본다. 신교수는 14일 동아닷컴과의 인터뷰에서 고대문헌에서부터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주요 사건을 거론하며 독도가 한국땅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했다.

▽독도가 한국 측 영토임을 증명하는 최초 문건의 정확성.

독도가 한민족의 영토임을 증명하는 첫 문구는 삼국사기에 등장한다. 신라 지증왕 13년(서기 512년) 신라장군 이사부가 우산국의 영토인 울릉도와 우산도를 정복했다는 내용.

일본 측은 이에 대해 우산국에 울릉도가 포함된 것은 알겠는데 우산국에 독도가 포함된 증거가 있느냐고 공격한다. 이에 대한 명백한 증거가 있다. 조선시대에 편찬된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울릉도와 우산도는 마주보는 섬이며 모두 우산국의 땅이었다고 기술돼 있다. 즉 우산도는 현재의 독도임을 알게 한다. 고려사 등에도 이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독도뿐만 아니라 울릉도까지 빼앗으려 한 일본.

일본은 1693년경부터 대마도주를 중심으로 울릉도와 독도를 차지하려 했다. 당시 조선은 왜구의 침략에 의해 울릉도민들이 피해를 입을 것을 우려해 주민들을 대피시키면서 섬이 비었다. 이 때를 틈타 일본이 마음껏 울릉도 인근에서 조업을 하고 나무를 베어갔다. 일본은 울릉도 인해의 풍부한 어자원과 울릉도의 삼림자원에 눈독을 들였다. 울릉도에 사람은 살지 않았지만 물고기가 많이 잡혀 조선어부들도 항상 고기를 잡고 있었고 일본 어부들과 충돌이 잦았다. 조선어부들은 이 곳이 조선 땅임을 명백히 알고 있었고 마침내 어부 안용복이 나서서 일본 어부를 제지하다 외교문제로 비화됐다.

△안용복의 외교적 승리와 대마도주의 음모

일본에 납치돼간 안용복은 오히려 일본 정부에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 땅임을 주장했고 일본 정부가 이를 계기로 영토 조사를 실시했다. 일본 정부는 결국 ‘신증동국여지승람’ 등 조선의 지도에 두 섬이 조선 소유임이 명시된 사실 등을 통해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 땅임을 확인했다. 일본 정부에 확인 문서를 요구한 안용복은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 땅이라는 확인 문서를 받아내는데 성공했지만 귀국 도중 나가사키에서 일본 관리의 술수에 빠져 이를 빼앗기고 만다. 대마도주는 일본 정부가 안용복에게 준 확인문서가 없어졌으므로 이를 기회로 한국에 일본 땅을 침범하지 말라고 역공을 취한다. “동해에 죽도라는 일본 땅이 있는데 침범하면 처벌하겠다”고 통보한다. 죽도는 당시 일본이 울릉도를 가리키는 말로 이 문서대로 하면 울릉도까지 일본 영토가 되어 빼앗기는 셈이었다.

△조선의 강경 대응

당시 조선정부는 강온파가 논쟁을 벌였으나 외교분쟁을 우려해 처음에는 죽도가 울릉도임을 모른 체 하고 일본 측의 주장을 들어주려 했다. 그러나 영의정 남구만 등 강경파가 다시 “죽도는 울릉도와 이름이 다를 뿐이다. 앞으로 일본인이 울릉도에 와서 고기를 잡으면 처벌하겠다”는 강경책으로 나섰다.

▽일본 정부의 울릉도 독도 한국 영토 인정

이 같은 상황에서 대마도주가 1696년 정권을 잡고 있던 도쿠가와 막부에게 이 문제를 질의한 결과 막부는 두 섬이 조선영토임을 인정하고 1699년 공식 문서로 작성했다. 이를 뒷받침하는 지도가 1785년 일본에서 나온 ‘삼국접양지도’이다. 비슷한 시기에 나온 ‘총회도’에도 두 섬은 조선의 영토로 표시돼 있다. 이 때부터 당분간 울릉도와 독도 문제는 잦아들었고 두 섬은 한국 영토로 인정받았다.

▽명치유신 후에도 일본은 울릉도와 독도가 한국 땅임을 알고 있었다

일본의 일부 학자들은 막부가 울릉도 독도가 조선 땅임을 인정했지만 이는 옛날이야기고 근대정부는 그렇지 않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일본이 근대개혁을 이룩한 명치유신 직후인 1869년 일본은 죽도(울릉도), 송도(독도)가 조선 땅이 된 상황을 조사케 했다. 이후 1876년 일본 지도를 작성할 당시 두 섬을 일본 영토에 포함시킬 것인지 여부를 고민했다. 이에 일본은 수개월간 정밀 조사를 벌였고 결국 총리대신이 울릉도와 독도를 일본 영토에서 뺄 것을 지시했다. 이후 일본 육군 및 해군지도는 울릉도와 독도가 한국 땅임을 표시했다.

▽문제는 1904년부터였다

1904년 일본의 어업가가 독도 인근에서 물개잡이 독점권을 얻으려 한국 정부에 이를 신청하려 했다. 그러나 당시 독도에 망루를 설치하려 했던 해군성 장교가 어업가를 설득해 한국정부에 독점권을 요청할 것이 아니라 일본 정부에 독도를 새 영토로 편입할 것을 요청하도록 했다. 당시 독도에 사람이 살지 않고 있기 때문에 이를 일본 정부가 새 영토로 편입하자는 것이었다. 한국에서의 영향력을 높여 가던 일본은 1905년 독도를 일본 영토로 편입했다. 그러나 이는 국제법상 절차를 위반한 것이었다. 새 영토를 편입할 때는 주변 국가에 이에 대한 내용을 조회해야하는데 그렇지 않았다.

▽미군정의 반환과 일본의 도발

태평양전쟁이 끝난 뒤 연합군과 미군정은 제주도 울릉도 독도를 한국으로 귀속시켰다. 그러나 일본은 1952년 1월 28일에 독도문제를 제기했다. 이해 이승만 대통령이 독도를 포함한 주변 해역에 대한 주권을 선언하자 일본은 이에 대한 반발로 독도가 일본 영토라는 주장을 제기했다. 또 일본은 이후 한국 전쟁을 틈타 독도에 자주 침범했다. 일본은 또 1954년에 국제사법재판소에 분쟁지로 소송을 하려 했다. 그러나 한국은 독도가 명백한 한국 영토이므로 소송을 할 필요가 없다며 응하지 않았다.

이후 일본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독도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신교수는 “한국정부가 일본에 대해 전향적인 모습을 보이자 일본이 공격적으로 나오고 있다”고 분석했다. 그는 “이번 사태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않으면 지금 교육을 받은 일본의 10대들이 후에 독도 탈환을 주장하며 한일 관계를 더 긴장상태로 몰고 갈 수 있다”며 한국측의 강경대응을 주장했다.

이원홍 기자 bluesky@donga.com


▲ 영상취재 : 동아일보 사진부 전영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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