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무적 판단… 배경 없어” 해명 분위기
힐, 李주미대사 만나 “적절한 방안 검토”
《미국 행정부가 독도 영유권의 재분류가 일으킨 외교적 파문에 당혹스러워하며 다른 분쟁지역까지 ‘주권 미지정’으로 분류하는 것에 큰 부담을 느끼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따라 ‘주권 미지정’ 분류 정책 자체를 철회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29일(현지 시간) 이태식 주미 한국대사와 만나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의 이름을 거론하며 국무부 측과 협의해 문제를 해결하길 바란다는 태도를 보인 것도 이 같은 관측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독도, ‘주권 미지정’ 공교로운 첫 사례=미국 지명위원회(BGN)가 독도를 ‘주권 미지정’으로 분류한 것은 지난해 1월 전 세계 50여 개 분쟁지역 전체를 ‘주권 미지정’으로 재분류하기로 결정한 데 따른 조치였던 것으로 밝혀졌다.
워싱턴의 정통한 소식통은 30일 “BGN은 지난해 1월 중국-베트남 간의 시사군도(西沙群島·Paracel Islands), 일본-러시아 간의 쿠릴 열도 등 세계의 주요 분쟁지역 50여 곳의 주권 관련 표기를 정리하기 위해 ‘주권 미지정’이란 코드를 신설했다”고 전했다.
이 분류는 ‘해당 지역의 주권 상태를 확실히 단정할 수 없거나, 미국이 한쪽 편을 들지 않는 분쟁지역’에 대해 사용될 수 있도록 규정됐다.
이후 BGN은 지난해 6월 이 분류에 어떤 지역을 포함시킬 것인지 검토했다. 그 결과 일단 난사군도(南沙群島·Spratly Islands), 시사군도에 대해 ‘국명’을 검색하면 소속 국가 대신 섬 이름이 나오도록 조치하기로 했다. 쿠릴 열도(북방 4개 섬)에 대해서도 논의가 이뤄졌다.
그러나 사실상 실행이 되지 않던 ‘주권 미지정’ 표기의 첫 적용 대상으로 독도가 선정된 계기는 지난해 말 주제어 분류 정리 작업을 하던 의회도서관이 ‘독도’ 대신 ‘리앙쿠르 록스’를 사용하는 BGN에 질의한 데 따른 것으로 알려졌다.
의회도서관의 질의를 받은 BGN은 국무부 등에 의견을 물어본 뒤 ‘주권 미지정’ 분류를 독도에 적용키로 했다는 것이다.
이런 정황만으로 보면 ‘주권 미지정’ 분류는 미국 내 지리, 지명 전문가 그룹의 실무적 판단에 따라 이뤄진 것이며 우연의 일치로 한일 간 독도 논란과 시기가 겹친 것으로 풀이된다.
그러나 BGN의 해외지명 담당 사무총장인 렌덜 플린 씨를 비롯한 전문가 그룹이 ‘주권 미지정’ 분류를 만들기로 한 배경에 일본을 배려하려는 의도가 전혀 없었는지는 단언할 수 없다.
영토 문제로 갈등이 빚어지는 여러 지역에 일본이 관련돼 있고 대부분 일본에 불리하게 ‘실효적 지배 국가’가 영유권 국가로 표기돼 있기 때문이다.
▽당혹스러워하는 미국 정부=독도 문제가 불거진 뒤 미일동맹과 기타 우방과의 관계에서 균형을 취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인 미 백악관과 국무부는 이번 독도 파문에 매우 당혹스러워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 외교 소식통은 “미일동맹이 2000년대 들어 미영동맹 수준으로 격상됐지만 북핵 문제와 테러와의 전쟁 등 여러 측면에서 미 행정부로선 한미동맹을 더 신경 쓰는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더구나 ‘주권 미지정’ 분류 방침을 앞으로 쿠릴 열도, 난사군도 등 대표적 분쟁지역으로 확대 적용할 경우 이번 독도 파문 못지않은 논란이 계속될 수 있다는 점을 미 행정부는 우려하고 있다.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격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존 네그로폰테 국무부 부장관 등은 28일 이태식 주미대사와의 면담에서 “시기적으로 적절치 못했다”고 인정했다. 크리스토퍼 힐 국무부 차관보는 29일 이 대사와의 이틀째 면담에서 적절한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이런 분위기 때문인지 미국 내 지명 전문가 그룹의 사정에 정통한 한 학자는 본보와의 통화에서 “좋은 소식이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청와대 관계자도 “미국 측으로부터 이 문제와 관련해 ‘검토해 보겠다’는 답변을 들은 상태”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앞으로 백악관, 국무부와 플린 박사를 중심으로 한 전문가 그룹 사이에 갈등이 빚어질 가능성도 있다. 플린 박사는 28일 김영기 조지워싱턴대 교수가 ‘임시적으로라도 원상회복할 수 없느냐’고 질의한 데 대해 “불가능하다”고 답변했다.
플린 박사는 본보의 전화 및 e메일 질의서에 ‘공보과에서 답해줄 것’이라고만 답변했고, BGN 공보과는 국무부 공보과로 모든 책임을 넘겼다.
워싱턴=이기홍 특파원 sechepa@donga.com
하태원 특파원 triplet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