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4년 도쿄 /‘3분에 인생이 바뀌었다’ 성화 봉송 주자
성화의 불꽃이 지금도 타오르고 있다. 이 말을 듣고 가고시마(鹿児島)로 날아갔다. 1964년에 열린 도쿄(東京) 올림픽에서, 아테네에서 채화된 성화가 오키나와(沖縄)를 경유해 비행기로 옮겨진 일본 본토 최초의 땅이다.
가고시마시의 교외에 있는 현립 청소년 연수 센터. ‘희망의 불’이라 이름을 붙인 그 불은 본관 로비의 선박용 램프 안에서 오렌지색으로 불타고 있었다. 3센티 정도의 불꽃이 하늘거리고 있었다.
1982년에 당시, 연수 센터의 차장이 아는 이로부터 양도를 받았다. 아는 사람은 성화 릴레이 당시, 낙도의 초등학교 교장으로부터 ‘섬에 사는 아이들에게도 보여 주고 싶다’는 간곡한 부탁을 받고 남몰래 성화를 옮겨 자택에 보존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후, 직원들이 일주일에 한 번씩 급유와 청소를 하면서 불을 지켜왔다. 손에 촛불을 들고 모이는 모임이나 캠프파이어 등에 사용한다. 하마시마 마스미(浜島真澄) 연수 주사(47)는 ‘작은 불꽃이지만. 많은 사람들의 정성이 담긴 불꽃이지요. 전후 부흥의 상징으로 세계의 인정을 받은 도쿄 올림픽인 만큼, 같은 불꽃이라도 느낌이 다릅니다”라고 이야기한다.
그 성화 릴레이의 최종 주자는 당시 와세다(早稻田)대학 학생이었던 사카이 요시노리(坂井義則) 씨(62)다. 히로시마(廣島)에 원폭이 투하되던 날 태어났고 달리는 폼이 멋있다고 하여 선발되었다. 일본 전역의 주목을 한 몸에 받았다. 그 후 어디를 가더라도 모르는 사람들이 말을 걸어 왔다고 한다. ‘(성화를 손에 들고 달린) 3분이 인생을 바꾸었다.’
패전의 어려움을 딛고 재기에 성공한 일본을 세계에 알린 도쿄 올림픽. “국민 한 사람 한사람의 참여 의식이 대단했다. 그래서 나는 비뚤어진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고 지금도 생각한다. 당시를 아는 사람들의, 그 당시 가졌던 희망을 깨버릴 수는 없다.”
올림픽을 전후로 도쿄에는 고층 빌딩이 건설되고 신칸센도 개통되었다. 평론가 마쓰모토 겐이치(松本健一) 씨(62)는 “구미를 따라 잡으려고 필사적으로 달려 온 일본이 그‘근대 일본’이란 틀을 벗어나 구미의 수준이 되었다고 의식을 전환한 것이 도쿄 올림픽”이었다고 한다. 올림픽은 발전 도상에 있는 아시아의 각 나라가 ‘세계에 인정을 받게 되었다’는 자신감을 얻는 장치라고도 할 것이다.
1988년 서울 / 비판적이었던 김영삼 이제는 평가
민주화 운동은 일반 시민에게도 확산되어 이듬해인 1987년에는 최고조에 달했다. 정권 여당은 6월 말 ‘민주화’를 약속했다. “정부는 올림픽을 앞에 두고 세계적으로 고립되는 강경 수단은 쓸 수가 없었다. 올림픽 유치는 결과적으로 민주화에 큰 공헌을 했다.”
TV로 개회식을 본 이 씨는 ‘이런 잠재력이 이 나라에 있었는가’라며 가슴이 뭉클해졌다. 또한, 그는 일본 신문사의 서울 지국에서 일을 하면서 일본인 기자들이 한국의 사회와 문화 등 다양한 부분을 취재하는 모습들도 가까이서 보았다. “올림픽은 단순한 운동회가 아니라, 한국의 모습을 세계에 전하는 역할도 담당한다는 것을 알았다.”
1987년에 야당인 통일 민주당의 총재로 취임했던 김영삼 전 대통령(80)은 취임 당시 서울 올림픽을 나치 지배하의 베를린 올림픽에 비유하는 발언을 했었다. 지금은 “올림픽은 한국이 정치적, 국제적으로 발전하는 기회가 되었다. 국민들에게 일류 국가가 될 수 있다는 용기를 주었다”고 평가한다. “멀게 만 느껴졌던 소련의 사람들이 한국에 온 것도 컸다”고도 회상한다.
반공주의 국가였던 한국에게 있어 소련이나 중국 등 사회주의 진영은 이른바 ‘적’이었다. 국교도 없었다. 당시 고등학교 교사였던 류연창(柳然昌) 씨(60)는 양 국 선수들을 보고‘우리와 똑 같은 인간이다. 서로 대화를 할 수 있는 상대’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마음이 글로벌화 되었다.’
올림픽을 발판으로 한국은 북방 외교를 전개하여 소련, 중국과 국교를 정상화시켜 갔다. 올림픽 후에는 외국 여행도 자유화되었다. 교회 단체에서 민주화 운동에 참가했던 오재식(吳在植) 씨(74)는 “올림픽으로 모든 국제적인 표준들이 한국에 들어와, 시민들에 대한 교육 효과도 있었다. 민주화, 평화, 인권에 대한 세계의 전망을 배웠다”고 지적한다.
선진국을 목표로 하는 나라에 있어서, 올림픽은 급격한 개발을 동반한다. 공해와 강제 철거 등 마이너스의 부분도 있다. 그러나 일본과 한국에서는 ‘나라의 도량’을 넓히는 역할을 했다.
정치와 스포츠는 별개라고 한다. 그러나 서울 올림픽 조직 위원장이었던 박세직(朴世直) 재향 군인회 회장(74)은 “스포츠를 통하여 사고가 바뀌면 정치도 따라 바뀐다”고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한국인으로서의 자긍심을 갖게 된 것이다.” 국민의 자신과 자긍심은 마음의 여유를 낳았고, 그 나라를 다음 발전 단계로 향하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2008년 베이징(北京) / 개발 일변도의 전환점이 될 것인지
“줄 서요. 줄 서!” “내리는 사람이 먼저예요.”
오후 5시가 넘어 통근 객으로 북적이는 베이징(北京)시 건국문 밖의 지하철 홈에서 여성들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모두 노란색 재킷에 질서를 지키자는 슬로건이 적힌 빨간 어깨띠를 매고 있었다. ‘수도 정신문명 건설 위원회’가 추진하는 매너 향상 캠페인의 활동 부대였다.
이 위원회에서는 질서를 지키는 매너와 침을 뱉을 때는 화장지를 사용하자는 등의 운동을 추진하고 있다. “올림픽을 위해서라고 말하는 것만으로도 효과가 있다”며 정모지에(鄭黙傑) 부주임은 말한다.
베이징에서는 건설 붐이 계속되었고 지하철 등 교통망 정비도 진행되고 있다. 회계사 몽웨이홍(孟衛紅) 씨(44)의 집 가까운 곳에도 곧 지하철이 개통되어, 버스로 30분은 걸렸던 시내 중심부까지 10분에 갈 수 있게 된다. 예전에는 악취가 풍기던 근처의 강도 깨끗하게 정비되었다. “교통과 환경 면에서는 변화를 실감합니다.” 몽(孟) 씨는 “지난 30년 동안의 개혁과 개방으로 중국 사람들의 생활수준은 아주 높아졌다”며 자부심을 보였다.
올림픽 조직 위원회에 의하면, 경기장에 필요한 자원 봉사자 10만 명에 대해 90만 명이 신청했고 영어 공부를 시작한 시민도 적지 않다고 한다.
국무원 발전 연구 센터 연구원 장윤환(張雲方) 씨(63)는 “올림픽에서는 경제보다 정치, 정치보다 문화가 중요”하다고 지적한다. “민족 진흥에는 평화적인 이념과 철학이 필요하다. 올림픽은 그것을 키우는 계기가 될 것이다”라고 했다.
중국 정부는 2004년 헌법에 ‘인권의 존중과 보장’을 포함시켰다. 정부 비판을 계속해 온 프리라이터 리우시아오보(劉暁波) 씨(52)는 “조금씩이지만 언론의 자유와 인권을 요구하는 움직임이 인정받게 되었다.” 단, 티벳 자치구 등에서 소란이 일어나 올림픽에 대한 영향이 주목을 받고 있다. “정부는 침착하게 대화하는 것이 좋다”고 말한다.
일본에서 활동하는 저널리스트 모방후(莫邦富) 씨(55)는 베이징 올림픽을 ‘입춘’이라 비유한다. “그 날의 전후로는 차이가 확실하지 않지만, 꽃이 피는 봄을 부르는 절기다. 중국은 격차 등의 문제도 안고 있지만, 올림픽은 개발 일변도를 바꾸어 놓는 전환점이 되지 않을까”라고 본다.
오오쿠보 마키(大久保真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