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역사상 첫 흑인 대선 후보 탄생의 최대 동력은 뭐니 뭐니 해도 미국 사회 저변에서 끓어온 변화에의 욕구였다. 수렁에 빠진 이라크전쟁, 경제난, 워싱턴 정가의 부패 스캔들…. 조지 W 부시 행정부 7년 반의 실정(失政)이 쌓이고 쌓이면서 형성된 변화에 대한 욕구가, 이를 먼저 읽고 캐치프레이즈로 내건 버락 오바마 후보의 통찰력과 맞물려 ‘역사의 새로운 챕터’로 이어진 것이다. 이 때문에 28일 오바마 후보의 수락 연설을 놓고 역사적 후보 지명에 걸맞은 ‘기념비적 연설’이 될 것이란 기대가 무성했고 온 세계의 관심도 여기에 쏠렸다. 그런데 막상 이날 연설은 뜻밖이라 할 만큼 매우 구체적이었다. 원대한 비전과 시대에 대한 통찰이 담길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현실 비판과 각론 위주였다. “변화를 외치는 데 막상 콘텐츠가 없다”는 비판을 의식한 듯 다양한 이슈별로 선명한 정책 방향을 제시했다.》
부시 행정부와 존 매케인 공화당 후보에 대한 비판의 수위는 경선 시작 이래 가장 통렬했다. 어조도 평소보다 높았다. 차분하게 울려 퍼지는 저음의 웅변조로 단문을 이어가던 평소와 달리 중간 중간 매우 빠른 대화체가 섞이곤 했다.
8만4000여 명의 청중이 대형 풋볼경기장인 인베스코필드를 가득 메운 가운데 등단한 오바마 후보가 진단한 미국의 현주소는 암울했다.
전쟁을 치르고 있고, 경제는 격랑이며, 더 많이 일해도 점점 더 조금 벌고, 일자리와 집을 잃는 사람은 점점 늘어나고…. 더 큰 문제는 미국의 근본적 힘인 ‘미국의 약속’이 위협받고 있다는 게 그의 진단이었다.
그는 연설 서두에서 “케냐 출신 흑인 유학생과 백인 여학생 사이에 태어나 풍족하지 못한 환경에서 자랐지만 노력하면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있던 한 젊은이”의 스토리를 소개하면서 바로 ‘믿음’이 미국의 약속이라고 강조했다.
오바마 후보는 그런 위기의 최대 원인으로 부시 행정부의 실패를 꼽았다. 이어 90%가량이나 부시 행정부 정책을 지지한 매케인 후보의 의정활동 투표 경력을 거론하며 ‘매케인의 당선은 부시 행정부 3기’라는 연결고리를 확실히 했다.
그러고는 자신이 집권할 경우 얼마나 선명히 대비되는 정책이 펼쳐질 것인가를 상세히 제시했다.
공장을 해외로 이전하는 대기업에 대한 세제 혜택을 중단하는 대신 그 혜택을 국내에서 고용을 창출하는 기업에 돌리고, 노동자 가족의 95%에게 세금 감면을 해주며, 소규모 사업자의 자본이득세를 폐지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는 또 10년 내에 중동에의 석유 의존을 종식시키겠다고 약속했다. 교원 처우 대폭 향상, 전 국민 건강보험 수혜 등도 청사진으로 제시했다.
자신의 지지기반이 근로계층, 서민임을 다시 한 번 명확히 한 것이지만 막상 엄청난 재원을 어떻게 마련할 것인지 등은 제시하지 않아 포퓰리즘(대중영합주의)이라는 비판을 받을 소지를 남겼다.
그동안 매케인 후보 캠프가 자신에게 가해 온 공격들에 대해서도 맘먹은 듯 정면으로 반격했다.
자신을 겉만 번지르르한 ‘유명인사’로 비유한 공격에 대해 오바마 후보는 자신의 할머니부터 이름 없는 노동자 등 살면서 만난 ‘작은 영웅’들을 거론하며 “나의 유명인, 나의 영웅들은 바로 그런 사람이며 내가 대통령이 되려는 이유도 바로 그들을 대신해 미국의 약속을 되살리기 위한 것”이라고 반박했다.
외교안보 경험이 일천하다는 이유로 군 최고통수권자로서의 판단력 문제를 지적하는 매케인 후보 측의 공격에 대해서도 민주당의 역사를 거론하면서 “정면으로 토론을 해보자”고 반격했다. 애국심 논쟁에 대해서도 “자신과 생각이 다르다고 성격이나 애국심을 걸고넘어지는 그런 정치를 바꿔야 한다”며 ‘통합’의 정치를 역설했다.
하지만 인종 문제에 대해선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 다만 그는 “신념과 피부색, 살아온 길의 차이를 떠나 모든 이들이 함께 전진해야 한다”는 마틴 루서 킹 목사의 말을 인용했다.
연설 후반부에 접어들면서 특유의 감성적이면서 화려한 수사를 회복한 그가 “미국의 약속을 흔들림 없이 지키자”고 호소할 때 일부 청중은 눈물을 글썽였다.
평론가들 사이에선 그동안 역설해 온 변화와 통합의 구체적 내용을 제시하고 공화당과의 차별성을 선명히 부각해 지지층을 결집시킨 효과적인 연설이었다는 긍정적 평가와 ‘안티 매케인’에 치중하고 지나치게 각론을 나열했다는 비판적 평가가 동시에 나왔다.
덴버=이기홍 특파원 sechepa@donga.com
■ 세 연설 ‘변화 지향’ 공통점
▼케네디 “뉴 프런티어 정신”
킹목사 “나에겐 꿈이 있다”
오바마 “꿈은 이룰 수 있다”▼
28일 버락 오바마 상원의원의 민주당 대선후보 수락연설은 여러모로 1960년 존 F 케네디 전 대통령의 연설, 그리고 1963년 마틴 루서 킹 목사의 연설과 비교된다.
일찌감치 ‘블랙 케네디’라고 불린 오바마 후보는 케네디 전 대통령처럼 이번에 옥외에서 대선후보 수락연설을 했다. 48년 전 케네디 전 대통령도 민주당 대선후보 수락연설 장소로 옥외인 로스앤젤레스 콜로세움을 택했다.
‘미국의 약속’이라 명명될 법한 오바마 후보의 연설은 내용에서도 케네디 전 대통령이 당시 미국민에게 불어넣은 ‘꿈과 희망’의 21세기판이라 할 만하다.
당시 ‘달나라 여행’이라는 새로운 꿈을 이야기했던 케네디 후보는 연설에서 “이 시대는 창의력과 혁신, 상상력 그리고 결단력을 요구한다”며 “나는 여러분 모두가 ‘뉴 프런티어’의 개척자가 되기를 요구한다”고 강조했다.
28일 오바마 후보는 “미국(역사) 232년은 ‘노력하면 꿈을 이룰 수 있다’는 약속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보통 사람들이 떨쳐 일어나 희망을 이어갈 수 있도록 용기를 보여준 역사”라며 “올해 대선은 21세기 미국의 약속이 다시 살아 숨쉴 수 있도록 할 수 있는 기회”라고 호소했다.
28일은 흑인인권운동가인 킹 목사가 워싱턴의 링컨 메모리얼에서 군중 25만 명 앞에 나서 ‘나에겐 꿈이 있다’는 연설을 한 지 딱 45년이 되는 날이기도 하다.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연설 중 하나로 꼽히는 이 연설에서 킹 목사는 “언젠가 이 나라가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그걸 신조로 여기면서 살아가는 날이 오리라는 꿈이 있다”며 “그것은 나와 내 자녀들이 피부색이 아니라 인격에 따라 평가받는 날이 오리라는 꿈”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킹 목사는 “하지만 이 길은 혼자 걸어갈 수 없는 길”이라고 강조했다.
오바마 후보도 후보 수락 연설에서 “45년 전 조지아 주 출신의 젊은 목사(킹 목사)의 약속을 떠올리게 된다”며 “신념과 피부색이 다르고 살아온 인생이 다르다 해도 모두 하나가 될 때 우리의 꿈을 이룰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우리는 혼자서 걸을 수 없을 뿐 아니라 뒤를 돌아봐서도 안 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