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정용관]패밀리 밸류

  • 입력 2008년 9월 16일 03시 00분


간혹 이런 상상을 해본다.

우리나라에서도 어느 유력 대선 후보의 20대 아들 혹은 딸이 자신의 아버지 혹은 어머니가 그리는 국가 비전과 구체적인 대선 공약을 설명하며 공개적으로 지지 유세를 벌이는 장면을.

퇴임을 앞둔, 인기도 없는 현직 대통령의 부인이 남편 소속 정당의 전당대회에서 그 정당의 대선 후보를 지지해 달라고 연설하는 모습은 또 어떨까.

웬 뚱딴지같은 소리냐고 할지 모르겠다.

추석 연휴 기간에 만난 지인들에게 같은 얘기를 했더니 “정치인들 꼴도 보기 싫은데 그 가족들까지 나대는 것을 눈 뜨고 보라는 얘기냐”는 싸늘한 반응이 많았다.

시공간을 잠시 옮겨보자.

올 1월 미국 정치사상 최대 혈전이었다는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의 막이 오른 뒤 힐러리 클린턴 상원의원의 딸 첼시가 미주리 주 컬럼비아라는 인구 12만여 명의 대학도시를 찾은 적이 있었다.

약간 웨이브를 넣은 긴 머리에 단정한 옷차림의 첼시는 미주리주립대 안의 메모리얼유니언 건물에서 대학생 300여 명을 상대로 힐러리의 건강보험 개혁안, 심지어 대외 정책의 기조까지 설명했다.

‘딸의 유세’도 신기했지만 로컬 신문인 ‘미주리안’에 첼시의 유세 내용이 큼지막한 사진과 함께 1면 톱기사로 실린 것을 보고 더 놀랐다. 그러자 이 대학의 저널리즘 스쿨 4학년 학생이던 크리스티 토튼은 “딸이 어머니를 돕는 게 뭐가 이상하죠?”라고 반문해 기자만 머쓱해졌다.

지난달 초 방한한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장녀 바버라를 에어포스 원에 태워 온 것도 미국인들에게는 논란의 소재가 아닌 모양이다.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부시 대통령의 부인인 로라 부시 여사가 연단에 두 번이나 올라 존 매케인 후보를 지지해 달라는 연설을 하고 매케인의 부인 신디 여사를 직접 소개하는 장면을 TV를 통해 보면서 “우리와는 참 다른 것 같다”고 느꼈다.

미국 정치인과 그 가족이 관련된 얘기를 하다 보니 끔찍했던 기억도 떠오른다.

올 3월 엘리엇 스피처 전 뉴욕 주지사가 매춘 사건에 휘말려 사임했을 때다. 지금도 뇌리에 생생한 것은 스피처가 사퇴 기자회견을 할 때 ‘석고상’처럼 무표정한 얼굴을 한 채 옆에 서 있던 스피처의 부인 얼굴이다. 순간 힐러리 클린턴의 얼굴이 오버랩되면서 ‘텅 빈 영혼’의 그녀를 도살장 같은 기자회견장까지 나가도록 한 힘은 대체 무엇일까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요즘에는 미국 공화당 부통령 후보로 지명된 세라 페일린 알래스카 주지사가 화제다.

고교생 딸의 임신 사실 등이 보도돼 곤경에 처하기도 했지만 페일린은 자신의 처지를 모두 드러내 ‘보통 엄마’의 이미지를 미국인, 미국 여성들에게 각인시키며 극적인 반전을 이뤄냈다.

정치인의 가족이 좋은 일이건 나쁜 일이건 언론에 자주 노출되는 것을 그리 달갑게 보지 않는 사회 풍토에 젖어 있는 탓인지 미국 정치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어색하게 느껴질 때가 적지 않다.

분명한 것은 ‘패밀리 밸류(Family Value)’가 이번 미국 대선에서도 중요한 키워드의 하나로 등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시공간을 다시 한국으로 돌려보자.

대통령의 부인과 아들이 ‘음지의 정치’를 지향하며 온갖 문제를 일으켰다. 이런 폐해가 나타나지 않으면서 정치인 가족들도 자연스럽게 활동할 수 있는 사회가 한 번쯤 오는 것은 어떨까.

정용관 정치부 차장 yonga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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