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대선 복병 ‘527그룹’이 움직인다

  • 동아일보
  • 입력 2008년 9월 19일 02시 55분



2004년 ‘참전용사들’ 케리후보에 막판 결정타

고삐없는 네거티브 공세… 양 캠프서도 못말려

인터넷 통해 확산… 전파 쉬워져 폐해 더 클듯


미국 대통령선거 때마다 막판 승부의 복병이었던 ‘527그룹’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527그룹은 정당에 가입돼 있지 않은 독립적 정치 조직. 이들은 과거 선거 때마다 우후죽순처럼 생겨나 후보 진영은 엄두를 낼 수 없는 네거티브 공세에 앞장서 왔지만 이번 대선에선 이달 초까지만 해도 비교적 잠잠한 편이었다.

버락 오바마 민주당 후보와 존 매케인 공화당 후보가 진작부터 527그룹의 폐해를 경계하는 발언을 해 왔고 캠프 관계자들에게도 그들과 거리를 두라고 지시해 온 영향이 컸다.

그러나 이번 주 들어 진보 보수 양쪽에서 527그룹의 행보가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갈수록 가열되어 가는 선거판이 더욱 네거티브 공방으로 치닫는 기세다.

○ 쏟아지는 비방광고

‘용감한 새로운 정치행동위원회(Brave New PAC)’라는 리버럴 단체는 이번 주 초부터 CNN과 MSNBC에 매케인 후보를 비방하는 광고를 내보내고 있다.

베트남전쟁 포로 출신인 70세의 참전용사가 진지한 목소리로 “포로 경력이 나라를 경영할 충분조건은 아니다”며 “성질이 불같은 매케인 같은 이에게 레드버튼(핵무기 사용 명령)을 맡겨선 안 된다”고 강조한다.

우파에선 ‘아메리칸 이슈 프로젝트(American Issue Project)’라는 단체가 오바마 후보가 40년 전 국방부 테러를 시도한 과격단체의 주도자였던 윌리엄 에어스 일리노이대 교수와 친분을 쌓았다는 점을 물고 늘어지는 TV 광고를 내보내기 시작했다.

공영라디오방송(NPR)에 따르면 이 단체는 한 텍사스 사업가에게서 200만 달러 이상을 지원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 ‘제2의 스위프트 보트’ 우려

“그는 동료들을 배반했어요.” “배가 가라앉을 때 존 케리를 믿으면 안 됩니다.”

재선을 노리는 조지 W 부시 대통령과 민주당 존 케리 후보가 박빙의 승부를 벌이던 2004년 8월 ‘진실을 찾는 스위프트 보트 참전용사들(SBVT)’이란 낯선 단체가 만든 1분짜리 TV 광고가 등장했다.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케리 후보의 베트남전쟁 무공(武功)이 거짓이라는 증언이 당시 현장에 있었다는 참전용사들의 입을 통해 줄줄이 나왔다.

지금도 부시 재선의 1등 공신으로 꼽히는 이 광고는 진실과는 거리가 있었다. 광고에 등장한 13명의 참전용사 중 실제로 케리 중위가 지휘한 함정에 탔던 사람은 없었다. 실제 동승했던 사람들은 지금도 “케리는 영웅적으로 행동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SBVT는 사실 베트남전쟁 스위프트 보트 탑승 용사 3500명 중 겨우 250명이 이름을 올려 2004년에 급조한 단체였다.

물론 당시 부시 후보의 애리조나 주 선거책임자였던 매케인 상원의원은 이 광고를 맹렬히 비난했고 부시 대통령도 “그런 광고는 금지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SBVT는 막무가내였다. 이들과 부시 진영을 연결지을 끈은 없었다.

SBVT는 우익 성향이었지만 당시에도 세력 면에선 리버럴 단체들이 훨씬 컸다. 당시 연방정부가 지목한 톱 20개 단체 가운데 기금 모금 실적에서 1∼4위는 모두 리버럴 성향이었으며 이들 4개 단체가 선거 때 지출한 금액은 무려 2억5000만 달러가 넘었다.

이들 단체는 선거 후 대부분 해체됐다.

○ 제동을 걸어야 하지만…

527그룹에 고삐를 매야 한다는 여론이 높고, 실제 매케인 후보는 527그룹의 활동 내용을 모두 공개토록 하는 법안을 제출하기도 했다. 하지만 두 후보 진영은 이들이 상대 후보에게 제기하는 네거티브 주장의 진위에 대해선 “심판 역할을 할 수는 없다”며 발을 빼고 있다.

이번 대선은 527그룹의 네거티브 공세가 특히 심할 가능성이 우려된다. 막대한 TV 광고비의 제약에서 벗어나 인터넷에 동영상을 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존 기어 밴더빌트대 교수는 NPR와의 인터뷰에서 “527그룹들의 네거티브 영상물이 주류 언론의 관심을 끌고 이것이 전국적으로 반복 방영되는 현상이 가장 우려된다”고 말했다.

::527그룹이란

미국 국세청의 세금코드 제527조에 규정된 정치 단체. 주로 공직선거에 영향을 미치기 위한 목적에서 활동한다. 정치자금 모집 대상이나 액수에 한도가 없는 등 정당이나 후보들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법적 제약이 약하다.

워싱턴=이기홍 특파원 sechepa@donga.com
▼민주 반격카드는 인종문제?▼

미국 대선에서 인종 문제가 주요 이슈로 떠오르고 있다.

버락 오바마 민주당 대선후보의 러닝메이트 물망에 올랐던 캐슬린 시벨리우스 캔자스 주지사는 16일 아이오와 주 선거유세 도중 “여러분은 오바마 후보가 부분적으로 흑인이라는 사실을 눈치 채고 있나요”라고 반문했다.

최악의 경제위기에다 변화를 요구하는 미국민 정서를 감안하면 민주당으로서는 ‘질 수 없는 선거’처럼 보이지만 박빙의 승부를 벌이고 있는 이유를 묻는 질문에 대한 답을 위한 운 떼기였다.

그는 “당신과 오바마 후보는 다르다는 점을 은근히 부각시키는 ‘코드 랭귀지’가 이번 대선에서 중요한 요소로 등장하고 있다”며 “이번 선거의 진짜 이슈는 그 문제(인종 문제)”라고 말했다고 AP 등 미국 언론이 보도했다.

시벨리우스 주지사는 “그 ‘코드 랭귀지’는 선거 여론조사에서는 드러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해 ‘브래들리 효과’가 선거 막판에 재현될 수 있다는 점을 경계했다. 브래들리 효과란 1982년 캘리포니아 주지사 선거에 민주당 후보로 출마했던 톰 브래들리 전 로스앤젤레스 시장이 여론조사에서는 앞섰지만 실제 개표 결과 낮은 득표를 한 것을 지칭하는 말.

버지니아대 정치연구소의 래리 사바토 박사는 “선거 직전에 인종 변수가 작용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순진한 생각”이라며 “오바마 후보로서는 사전 여론조사에서 확실히 앞서지 못하면 승리를 장담할 수 없다”고 말했다.

물론 브래들리 효과가 더는 유효하지 않다는 반론도 있다.

하버드대의 대니얼 홉킨스 박사는 “자동응답 기능이 도입된 1990년대 후반 이후 전화 여론조사의 바이어스가 사라졌다”며 “질문에 직접 응답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 작용한 것”이라고 말했다.

공화당 측에서는 시벨리우스 주지사의 이날 발언이 인종 문제를 오히려 역이용해 존 매케인 후보를 인종주의자로 몰아붙이려는 고도의 정치적 공작이라고 비난했다.

앞서 오바마 후보는 7월 미주리 주 연설에서 “공화당은 내가 ‘애국심이 없고 희한한 이름(미들네임이 후세인임을 지칭하는 것)을 가졌고 역대 대통령과 생김새가 다르다’며 공포감과 거부감을 심어주려 한다”고 비난했다.

워싱턴=하태원 특파원 triplet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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