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대선]오바마 “나의 조용한 영웅이 떠났다”

  • 동아일보
  • 입력 2008년 11월 5일 03시 04분


투표일 하루전 외할머니 타계
대학 입학때까지 부모역할… 오바마 유세중 끝내 눈물


"하와이(원주민) 애들은 원래 수영을 저렇게 잘하나 보죠?"

1960년대 중반. 미국 하와이 바다에서 수영하는 흑인 아이를 바라보던 한 관광객이 해변에 서 있던 백인 노부부에게 물었다.

"저 애는 '공교롭게도' 내 외손자입니다. 애 엄마는 캔자스, 아빠는 케냐 내륙 출신인데 두 곳 다 '빌어먹을' 바다는 눈을 씻고 찾아도 없지요."

그 소년은 버락 오바마 민주당 대선후보였다. 관광객의 질문에 상처받은 마음을 퉁명스러운 대답으로 표출한 백인 외조부모는 소년 오바마의 성장기에 사실상 부모 못잖게 중요한 역할을 한 존재였다.

오바마 후보는 열 살에서 대학 입학 때까지 외조부모와 함께 살았는데 '백인 노부부와 흑인 손자' 세 사람이 꾸려가는 가정은 화목했지만 주변에서 보기에 '평범한 구성'은 아니었다.

하지만 외할머니 매들린 더넘 여사는 손자가 피부색 때문에 상처받을까봐 한없는 정성과 세심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그 손자가 자라나 대통령에 도전하는 과정을 '기적을 목도하는 것' 같은 심정으로 지켜봤다. TV뉴스에서 손자 얼굴을 더 분명하게 보려고 올초 각막이식수술까지 받았다.

그러나 기구하게도 투표 하루 전인 3일 새벽 더넘 여사는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손자를 키웠던 호놀룰루의 임대 서민아파트에서다. 향년 86세.

3일 오전 8시경 비보를 접한 오바마 후보는 눈에 띄게 침울했지만 오후 플로리다 주 유세를 강행했고 겉보기에 큰 흔들림은 없었다. 그러나 이어 노스캐롤라이나 주에서 야간 유세를 하던 중 끝내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그는 "할머니는 조용한 영웅들 가운데 한 분이었다. 이름이 신문에 실리지는 않지만 매일의 일상 속에서 열심히 살아온…"이라고 말하다 눈물을 흘렸다.

그는 그동안 가족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할머니에 대해 "한없이 나를 위해 희생해온, 새 차나, 옷을 사는 걸 미루고 손자에게 모든 걸 쏟아 부으신, 기회를 놓치지 말라고 가르쳐주신 분"이라며 그리워했다. 지난달 23, 24일엔 선거운동을 중단한 채 이틀간 할머니를 병문안했다.

영국계 이민자의 후손으로 외가 쪽으로 체로키인디언의 피가 섞인 더넘 여사는 엄격한 가정에서 성장해 고교 졸업 직후 결혼했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남편이 유럽에서 근무하는 동안 보잉사의 B-29 생산라인에서 일하기도 했다.

남편의 직장 때문에 텍사스에 살던 시절, 은행에 취직한 더넘 여사는 흑인 수위에게 '미스터'란 호칭을 붙였고 친절하게 말을 건네기도 했다. 그러다 동료로부터 "니거(흑인을 비하하는 표현)를 미스터라 부르면 안 된다"는 핀잔을 받았고, 이를 들은 나이든 흑인 수위가 구석에서 숨죽여 우는 걸 지켜봤다.

어느 날 퇴근하다 동네 아이들이 집 앞에 몰려와 '더티 양키' '니거 러버(흑인을 좋아하는 아이)' 등의 욕설을 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마당엔 딸 앤(오바마의 어머니)이 흑인 소녀와 함께 있었다. 더넘 여사는 벌벌 떨고 있는 흑인 소녀에게 "집안에 들어와 놀렴"하고 친절하게 말을 건넸지만 소녀는 갑자기 달려 사라졌다.

이런 경험들은 뒷날 남편의 가구사업 때문에 하와이로 이사한 직후 딸이 대학에서 만난 케냐 출신 남학생을 집에 데려왔을 때 결혼을 허락한 배경이 됐다.

더넘 여사는 고교졸업 학력이 전부지만 성실성과 인내심으로 말단 행원에서 하와이 지역은행 최초의 여성 부행장 자리까지 올라 사실상 가계를 꾸려갔다.

그런 어느 날 거리에서 갑자기 한 남자가 다가와 돈을 달라고 요구하는 일을 당했다. 그런데 그가 흑인이어서 본능적으로 무서워 한 자신을 발견했고, 나중에 그 얘기를 전해들은 사춘기 소년 오바마는 그 자신의 표현을 빌리면 '명치를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느끼면서 인종적 정체성으로 심각한 방황을 했다.

오바마 후보의 아버지는 1982년, 외할아버지는 1992년, 어머니는 1995년 타계했다.

워싱턴=이기홍특파원 sechep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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