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 경제규모의 25%, 석유소비의 25%를 차지하는 국가. 군사비 지출이 2위부터 47위까지의 국가가 지출한 것을 합친 것보다 많은 국가. 경제위기로 휘청거리고는 있지만 미국은 이처럼 여전히 슈퍼파워를 갖고 있다. 미국을 4년 동안 이끌 대통령이 20일 바뀐다. 버락 오바마 행정부의 등장은 전 세계에 메가톤급 변화를 가져올 것으로 전망된다. ‘오바마 시대’의 의미를 5차례에 걸쳐 전망해 본다.》
월街보너스 잔치는 이젠 옛말
감원한파에 직장구하기 감감
인프라 투자 등 1조달러 투입
미국發경제 불씨 살리기 기대
“해마다 연말이면 천문학적인 보너스 잔치로 흥청대던 기억이 먼 꿈속 같습니다. 2009년 한 해 고생하면 연말부턴 좀 풀리리란 기대를 갖고 견뎌야지요.”(데이비드 전 아틀라스캐피털 대표)
지난해 12월 24일 뉴욕 맨해튼 남단의 월스트리트.
월가의 상징으로 뉴욕증권거래소 근처에 있는 황소 동상 주변에서 기념사진을 찍는 일본계 관광객 몇 명뿐 거리 전체에 인적이 드물다. 물론 월가맨들은 대부분 크리스마스를 전후로 연말 휴가에 들어갔다. 하지만 2년 전 이맘때 240억 달러의 보너스가 월가에 풀려 맨해튼의 고급 아파트 중개업소들이 북적이던 때를 생각하면 격세지감이 느껴진다.
그나마 일거리가 있는 곳은 헤드헌팅 업체들이다.
헤드헌팅 업체 세스나그룹의 숀 킴 사장은 “금융위기 이후 구직 의뢰 건수가 한 달 400건 정도로 30% 정도 늘어났다”며 “전엔 연봉을 더 받을 수 있는 곳을 찾았지만 지금은 실직 상태에서 애타게 직장을 찾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미국 역사의 새로운 장으로 기록될 버락 오바마 시대는 이렇듯 엄혹한 경제 현실 속에서 첫 페이지를 연다.
일단 미국인 대다수는 1월 20일 출범하는 오바마 정부가 경제의 악순환 사이클에 제동을 걸어줄 것으로 기대하는 분위기다.
최대 과제를 경제회복에 두고 있는 오바마 당선인은 각료 인선에서도 경제팀을 가장 먼저 발표했고, 진용도 초호화급 스타군단으로 꾸렸다.
금융위기 수습의 최일선에서 뛴 티머시 가이트너 뉴욕연방준비은행 총재를 재무장관으로 발탁하고, 재무장관과 하버드대 총장을 지낸 로런스 서머스를 국가경제위원장에,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을 지낸 폴 볼커를 국가경제회복위원회 의장에 내정하는 등 검증된 베테랑들을 중용했다. 이 때문에 ‘드림팀’이라는 얘기도 나온다.
오바마 경제팀은 향후 2년간 8500억∼1조 달러에 이를 천문학적인 경기부양책과 제로금리를 통한 무제한의 통화공급이라는 두 가지 정책의 조합으로 경제살리기에 나선다.
1950년대 이후 최대 규모가 될 인프라 투자는 교량, 도로 등 전통적 인프라뿐만 아니라 차세대 에너지와 초고속 인터넷통신망 등에 초점을 둬 향후 세계 경제의 성장산업 지도에도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전망된다.
하지만 경기부양책에 대한 섣부른 기대감을 경계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일본은 과거 제로금리와 양적완화 정책을 시행했지만 유동성 함정에 깊게 빠져든 경험이 있다.
이미 2008년 한 해 200만 개의 일자리를 잃은 고용시장은 새해에 더욱 악화돼 2008년 말 6.7%인 실업률이 새해엔 8%, 심지어 9.4%(IHS글로벌인사이트 추정치)까지 치솟을 것이란 전망이 나오고 있다.
7년 동안 대형 부동산 중개회사인 C사 소속 중개인으로 활동했다가 최근 일자리를 잃은 새뮤얼 톰슨 씨는 “대통령이 바뀐다고 경제가 금방 살아나리란 기대는 하지 않지만 현재로선 오바마 정부 출범 외에는 기댈 곳이 없다”며 “오바마가 훗날 최초의 흑인 대통령으로서가 아니라 프랭클린 루스벨트처럼 미국을 위기에서 구한 대통령으로 기록되길 고대할 뿐”이라고 말했다.
뉴욕=신치영 특파원 higgledy@donga.com
워싱턴=이기홍 특파원 sechepa@donga.com
▼ 美 금융위기 3년전 예측, 프레스토위츠 경제전략연구소장▼
“소비제국 美위기는 ‘세계화 종언’
오바마, 다극화로 돌파구 찾아야”
2006년 저서 ‘부와 권력의 대이동’에서 미국 금융위기를 예측했던 클라이드 프레스토위츠(사진) 미국 경제전략연구소장은 지난해 12월 26일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2009년 세계경제는 예상보다 더 나쁠 수 있다”며 이같이 말했다.
그는 “소비제국인 미국이 소비를 줄이고 있고 새로운 대체시장이 등장하지 않은 현 상황은 세계경제를 지배해 왔던 세계화시스템의 작동 중단을 의미한다”고 강조했다.
―오바마 시대의 경제전망을 어둡게 보는 이유는….
“단기간에 경제가 어느 정도 회복될 수는 있다. 문제는 세계화 원리가 더는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점이다. 많은 사람은 현재 위기가 일과성의 불황이고, 이 시기를 넘기면 또다시 괜찮아질 것으로 믿지만 그렇지 않다.”
―세계화라는 시스템의 종언(終焉)을 뜻하는 것 같은데….
“최근 동아시아를 다녀왔다. 재계 인사들이나 정치지도자들은 미국의 보호주의 경향을 걱정하며 자국의 생산비용을 줄이고 경쟁력을 높여 수출을 늘리겠다는 궁리를 하고 있더라. 하지만 진짜 문제는 보호주의가 아니라 미국 전체가 더는 구매력을 갖지 못하게 됐다는 점이다. 좀 과장해서 말하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경제는 미국 소비자들을 위한 공급경제였다. 그동안 미국 시장을 겨냥한 수출에 진력해 온 국가로선 미국의 구매력 상실은 ‘시장’이 사라졌다는 뜻이다.”
―오바마 당선인이 주력해야 할 부분은….
“미국이 직면한 구조적 변화를 ‘질서 있게’ 진행하는 것이다. 막대한 무역적자와 재정적자를 줄이는 것도 시급한 과제다.”
―달러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현재 달러 강세는 2, 3년 내에 크게 약화될 것이다. 새 환율체제가 태동할 것이다. 현재의 변동환율제는 미국의 무책임을 낳았다. 달러가 기축통화라는 점 때문에 미국은 무책임하게 돈을 찍어냈다. 다른 나라들도 무책임했다. 수출주도형 정책을 추진한 국가들은 자국의 통화가 저평가되도록 시장에 지속적으로 개입했다. 향후 4∼5년은 환율체제를 포함한 새로운 국제경제 시스템을 만드는 진통기가 될 것이다.”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는 새로운 희망을 던졌나.
“위기 극복을 위해 전 세계가 합심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했다. 유럽연합(EU) 순번 의장국이었던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과 EU는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과 헨리 폴슨 재무장관보다 더 빨리 주요 8개국(G8)을 대체할 새 지도체제의 출범 필요성을 깨달았다. G20 회의는 유럽국가와 신흥경제대국들이 미국에 대해 ‘이봐 정신 차려. 이제 당신 나라의 위기는 세계가 공동으로 대처해야 할 우리 모두의 위기야’라고 말한 경종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의 슈퍼파워 지위는 상실된 것인가.
“군사력, 달러, 과학기술에 대한 투자 및 미국 대학의 경쟁력은 미국의 ‘슈퍼파워’ 지위를 떠받들어 온 지주 역할을 해 왔다. 여전히 미국은 초강대국의 위치를 유지하겠지만 이전처럼 압도적이진 않을 것이다. EU 국가를 모두 합치면 미국보다 경제력이 더 크며, 중국이나 인도의 부상도 미국의 상대적인 힘을 줄이는 요소다. 미국이 혼자서 할 수 없는 분야가 점점 늘어날 것이다. 미국의 군사력은 여전히 세계 최고이지만 아프가니스탄전쟁 같은 비정규전을 혼자서 마무리할 수 없다는 것이 좋은 예다.”
워싱턴=하태원 특파원 triplets@donga.com
○ 클라이드 프레스토위츠는…
△1941년생 △스와스모어대, 펜실베이니아대 경영대학원 △상무부 자문위원(1981∼1986년) △카네기평화재단 선임연구원(1987∼1989년) △경제전략연구소 창립자 겸 소장(1989년∼) △주요 저서: 사업하기 좋은 나라(1989년), 깡패국가(2003년), 부와 권력의 대이동(2006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