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일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국가의 위대함이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뤄내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역사상 전례가 없는 전 세계적인 기대와 환호 속에 출항하지만 자신 앞에 펼쳐질 길은 최근 반세기 미국 역사 중 가장 험한 바다가 될 것임을 엄중히 인식한 데서 나온 취임사다.
오바마 대통령은 1주일여 전에 완성한 취임사 원고를 수없이 다듬은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링컨 대통령이 남북전쟁 말기 때 한 1865년 2기 취임사를 읽고 또 읽었다고 한다.
“누구에게도 적개심을 갖지 말고, 모두에게 자애(慈愛)를 갖고, 상처를 치유하며 과업을 완수하자”던 링컨의 호소처럼 그는 통합과 단결을 호소했다. 초당파적 협력과 국민 에너지 결집이야말로 경제난의 높은 파도를 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연료라는 인식 때문이다.
자신이 준비한 경기부양책이 적시에 효과를 내지 못할 경우 실업률은 두 자릿수로 치솟고, 경기침체는 장기 불황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연방재정 적자는 이미 2008 회계연도에 사상 최고액인 1조2000억 달러를 넘어섰지만, 건강보험 확대 등 세금 쓸 곳은 수없이 널렸다.
여기에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어느 미국 대통령도 해결하지 못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은 갈수록 꼬이고 있고,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이란 시리아 북한 등 외교안보 분야의 도전 역시 어느 것 하나 쉽게 풀리기를 기대할 수 없는 상태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 최근현대사에서 역대 어느 대통령도 경험하지 못한 뜨거운 지지와 기대가 한순간 실망과 좌절로 바뀔 경우 위기 돌파에 필요한 국가적 동력을 한꺼번에 잃을 수도 있다는 인식이 책임감과 헌신, 희생을 강력히 호소한 배경이기도 하다.
객관적 여건은 그 어느 대통령보다 어려운 환경에서 출범하지만 바꿔 말하면 미국 역사상 가장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는 위치에 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국민의 절박한 위기의식, 조지 W 부시 행정부 8년의 실정(失政)에 대한 국민적 실망은 새 대통령에 대해 그 어느 지도자도 받아보지 못한 ‘믿고 밀어주자’는 분위기를 만들고 있다. 의회는 상하원 모두 민주당이 압도적 다수를 점하고 있으며 공화당은 1960년대 이래 가장 지리멸렬한 상태다. 게다가 오바마 대통령은 2년간의 선거운동 기간 방대한 규모의 풀뿌리지지 네트워크를 구축해 놓았으며, 온라인 모금과 자원봉사 동원 능력도 탁월하다.
프린스턴대 숀 윌렌츠(대통령학) 교수는 워싱턴포스트 인터뷰에서 “레이건 이래 오바마 만큼 대국민 설득력을 갖춘 대통령이 없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이래 오바마 만큼 국내외적 위기를 짊어지고 취임한 대통령도 없었다”며 “이런 조합이 대통령 권위의 재건을 가능케 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사실 그의 선거 승리와 취임 자체만으로도 미국 역사에 되돌릴 수 없는 진전을 이뤄냈다.
사춘기 시절 인종적 정체성으로 방황했던 흑인 소년이 품었던 아메리칸 드림의 실현은 “피부색이 아닌 인격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그날), 흑백 소년소녀가 팔짱을 끼고 형제자매처럼 걷는 그날이 오리라”는 마틴 루서 킹 목사의 ‘꿈’(1963년 연설)을 구현했다.
지난주 오바마 대통령 스스로 말했듯 흑인 대통령이 직무를 수행하는 모습 자체가 흑인 어린이가 자기 스스로를 바라보는 방식을 바꾸고 백인 어린이가 흑인 친구를 바라보는 방식을 바꿀 것이다. 베이비 붐 세대의 바통을 넘겨받은 X세대 선두주자인 오바마 이후의 세대들에게 인종 간에 놓인 심리적 ‘유리벽’은 허물어져갈 것이다.
물론 흑인가정의 빈곤 악순환 등 구조적 문제가 쉽게 해결될 수는 없다. 오바마 대통령이 흑인 개별 가정의 역할, 특히 아버지의 책임을 거듭 강조하는 것도 그런 맥락이다.
오바마 정부 출범으로 미국 사회는 로널드 레이건 시대 이후 상대적으로 소홀히 취급돼 온 사회복지, 빈곤 문제에 더 많은 관심을 쏟고 외교적으로도 다자주의와 협력의 새로운 기류로 접어들 것으로 전망된다. 또 이념적 편향 시대 8년을 끝내고 실용과 중도를 지향하는 초당파의 물결이 출렁일 것으로 보인다.
새로운 항해를 시작한 세계 최강국 미국이 오바마 대통령의 다짐대로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미국의 약속을 되찾고, 우리는 하나라는 근본적인 믿음을 재확인”할 수 있을지 기대와 관심이 쏠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