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문학의 거장들에 대해 이런 일장 강연을 한 사람은 예술가나 대학교수가 아니었다. 유럽 금융계의 수장인 쟝-클로드 트리셰 유럽중앙은행(ECB) 총재다. 그는 16일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금융연구센터(CGS)에서 '유럽의 문화적 정체성과 다양성'이라는 주제로 장시간 강연을 했다.
문학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금융권 인사가 문화에 대한 강의를 한 일차적인 이유는 그 주제로 강연을 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기 때문. ECB 이사회 멤버로 트리셰 총재와 함께 일한 적이 있는 오트마르 교수가 평소 문학적인 대화를 자주 나누던 그에게 특별 강연을 부탁했다.
하지만 트리셰 총재는 이날 강연을 시작하기 전 "경제와 문화, 돈과 시(詩) 사이에는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큰 연관성이 있다고 생각해서 이번 강연 초청을 받아들였다"고 설명했다.
그는 "6000년 전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에서 일어난 문명의 시작은 당시 사람들의 경제활동을 매일 기록하는 것에서 시작됐다"며 "이는 전 세계 모든 문학을 탄생시키는 길을 닦았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시와 금화는 오래 지속되고, 그것만의 독특한 리듬과 은유를 담아 가치를 유지한다는 점에서도 공통점을 갖는다. 가치를 교환하고 저장하는 수단이라는 점에서도 비슷하다. 사람의 손에서 손으로,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지고 대체 불가능하다는 특성 역시 공통점으로 꼽힌다.
마지막으로 문화와 돈을 사람들에게 속하고 사람들에 의해 공유된다는 점에서도 유사한 측면이 많다고 그는 강조했다.
이렇게 시작된 트리셰 총재의 강연은 단테와 괴테, 셰익스피어, 발레리 등의 작품 인용과 분석으로 화려하게 이어졌다. 그는 영어와 불어, 독어를 자유롭게 섞어 쓰며 원문을 많이 소개했다.
그는 "카이사르와 가이우스, 모세와 베드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름이 중요한 의미를 갖는 곳이라면 그 곳이 바로 진정한 유럽이 존재하는 곳"이라는 발레리의 1924년 에세이 등을 언급하며 유럽인의 정체성과 의미를 역설했다.
또 27개 회원국이 모인 유럽연합(EU)에서 문화의 다양성을 지키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통합을 이뤄낼 수 있는 지름길이라고 덧붙였다. ECB가 이를 위해 참여하고 있는 각종 문화 프로그램과 지원 사업도 설명했다.
이날 그의 강연에 대해 참신하다는 반응과 함께 "지금 같은 시기에 중앙은행총재가 하기에는 너무 한량한 내용"이라는 비판도 함께 나왔다. 유럽은 현재 실업률이 치솟고 올해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비롯한 각종 경제 관련 수치가 악화되는 상황. 연쇄 디폴트 위기에 놓인 동유럽 지원 방안을 놓고도 EU 회원국간 합의를 보지 못해 분열이 심화되고 있다.
외교전문지 포린폴리시의 한 기자는 "금융위기의 여파가 심화되는 상황에서 ECB 총재라면 현제의 급박한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에 대한 이야기에 더 비중을 뒀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이정은기자 light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