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소련 관리 ‘具家’를 ‘구가이’로 잘못 옮겨
“이제는 우리 가족 성(姓)이 ‘구가이’가 아니라 구(具)입니다.”
14일 모스크바 지방법원에서 재판을 통해 조상의 성을 되찾은 고려인 3세 이고리 구 씨(40)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1918년 함북 나진에서 연해주로 이주했던 구 씨의 할아버지는 갑자기 ‘구가이’라는 엉뚱한 성으로 바뀌어 불리기 시작했다. “성이 뭐냐”는 당시 소련 관리의 질문에 구 씨의 할아버지가 “구(具)가(家)입니다”라고 대답하자 한국말을 잘 모르는 관리가 ‘-ㅂ니다’를 뺀 ‘구가이’를 그대로 러시아어로 옮긴 것이다.
이 같은 방식으로 변형된 성은 오(吳) 노(盧) 유(柳) 허(許)씨 등 주로 한글 받침이 없는 성이다. 이들 성에는 ‘가이(gay)’라는 말이 사족으로 붙어 있다. 다만 이(李) 최(崔)씨 등 인구가 많은 성은 이런 사족이 없다.
사족이 붙은 성을 가진 후손 중 모스크바에 사는 고려인들은 2000년 중반부터 재판을 통해 조상 성 되찾기에 나섰다. 성을 ‘유가이’에서 ‘유’로 바로잡은 빅토르 유 씨(45)는 “최근 남북한에서 온 한인들을 만나다 보니 우리 가족의 성이 잘못됐다는 점을 뒤늦게 깨달았다”고 말했다.
고려인들은 성을 되찾아 기쁘지만 여권 부동산 자동차 문서를 다시 고쳐야 하는 등 불편도 적지 않다. 모스크바 고려인협회 발렌틴 천 사무국장은 “일제감정기의 유랑 생활과 스탈린 통치하의 강제 이주, 소련 붕괴 뒤 재이주 등 오랜 유민 생활 끝에 한국말까지 잊어버린 고려인들이 불편을 감수하고 성을 되찾는 것을 보면 한민족의 뿌리의식이 얼마나 깊은지 알 수 있다”고 말했다.
고려인들은 조상 성 되찾기와 함께 한국 전통을 되살리는 데도 앞장서고 있다. 최근 모스크바 한국식당은 불황에도 불구하고 주말마다 환갑잔치와 돌잔치를 벌이는 고려인들로 북적인다. 행사장에서 만난 이고리 김 씨는 “고려인은 대부분 가난해도 부모가 60세가 되면 반드시 환갑잔치를 열어야 한다는 인식이 깊다”고 전했다. 모스크바에 체류하는 한 한국 교민은 “전통문화 복원에는 고려인이 한국 교민보다 더 많은 열의를 보이고 있다”고 말했다.
모스크바=정위용 특파원 viyonz@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