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W 부시 미국 행정부 시절 테러용의자들을 신문할 때 사용했던 '가혹신문 방법'의 적나라한 내용을 보여주는 법무부 메모들이 16일 공개됐다.
버락 오바마 행정부가 이날 공개한 4건의 메모에는 제3세계 독재국가에서 자행되는 노골적이고 무차별적인 고문과는 개념이 약간 다르지만 심적 압박과 공포를 줄 목적으로 공권력이 사용할 수 있는 물리적 폭력의 가이드라인이 구체적으로 제시돼 있다. 특히 고문이라고 불러도 무방한 신문 방법이 여럿 포함돼 있다.
이 메모들은 2002~2005년 "어느 선까지 가혹신문이 허용될 수 있느냐"는 중앙정보국(CIA)의 질의에 따라 미 법무부 법률실이 작성해 내려 보낸 것이다. 총 14건의 구체적인 신문기법과 주의사항, 예상 효과와 단점 등이 자세히 적혀 있다.
물고문 논란을 빚어온 '워터 보딩(Waterboarding)'은 "피신문자를 바퀴 달린 침대에 눕게 해 묶은 뒤 침대를 10~15도 가량 기울인다. 피신문자의 코와 입에 천을 씌운 뒤 15~45㎝ 높이에서 물을 흘려 붓는다. 한번에 40초 이상 해선 안 된다"는 내용으로 돼 있다.
이 메모는 "피신문자가 물을 들이 마시지 않으므로 폐에는 물이 들어가지 않는다. 제대로 시행되면 심각한 신체적 고통을 주지는 않지만 질식사할지 모른다는 엄청난 공포감을 불러일으키며 천을 제거하는 순간 공포는 사라진다. 이 과정을 반복한다"고 보충 설명했다. 이 신문기법에 대해 에릭 홀더 법무장관은 16일 '고문'이라고 규정했다.
이와 별도로 '물 뿌리기' 신문 기법도 있었다. "차가운 물을 노즐 없는 호스로 뿌린다. 단 물은 마실 수 있는 물이어야 하며, 코나 입에 들어가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돼 있다.
수감자에 대한 구타와 관련해 법무부는 "얼굴이나 배를 손바닥으로 때리는 것은 허용된다. 이는 실제 고통보다 공포를 많이 준다"고 허용하면서 "단 얼굴을 때릴 땐 손가락을 펴서 손가락만으로 때려야 하며, 사전에 반지 등을 빼놓고 해야 한다"고 주의사항을 제시했다.
또 한 메모엔 "옷 벗기기, 잠재우지 않기, 식사 제한은 수감자를 고분고분하게 만들며 자신들의 기본적 생리적 욕구에 대해 스스로가 아무런 통제권이 없음을 깨닫게 만든다"며 "옷과 음식이 협력의 대가로 이용될 수 있다"고 적혀 있다. 잠재우지 않기의 최장 허용 선은 180시간(7.5일)으로 적혀 있다.
CIA가 신문에 매우 비협조적이었던 알카에다 고위 간부 테러리스트 아부 주바이다에 대해 질의한데 대한 답변 성격의 메모에서 법무부는 그가 벌레를 싫어한다는 점에 착안해 "애벌레로 가득 찬 박스에 가두는 기법을 사용해도 좋다"고 지시했다.
이 메모는 "주바이디에게 사전에 '너는 침을 쏘는 종류의 벌레들이 있는 박스에 갇히게 된다. 하지만 그 침은 죽거나 심각한 고통을 유발하는 것은 아니다'고 말해주라. 그러나 실제론 무해한(쏘지 않는) 애벌레를 넣어라"고 지시했다. 이 방법은 실제로 사용되지는 않았다.
2002년 처음 법무부의 승인을 받은 이런 가혹신문기법들은 2005년까지 CIA의 해외비밀감옥에서 자행됐다. 의사의 입회 및 모니터링 등 여러 전제조건을 달고, 고문금지국제협약에 노골적으로 위배되지 않기 위해 각각의 신문방법 마다 세세한 주문사항, 제한사항을 달아 놓았지만 민주주의와 인권의 본산을 자처하는 미국으로선 상상하기 힘든 일이라는 게 미국 사회의 반응이다.
이날 메모 공개는 미국시민자유연맹(ACLU)이 제기한 정보 공개 소송에 따라 법원이 메모 공개를 명령함에 따라 이뤄졌다. 메모 작성자는 현재 연방항소법원 판사인 스티븐 브래드버리 씨 등으로 되어 있다. 가혹신문 기법의 법률적 정당성 이론을 만들어낸 당사자인 한국계 존 유 당시 차관보가 직접 서명한 메모는 보이지 않는다.
오바마 대통령은 이날 성명을 통해 "이런 신문 방법들은 미국의 도덕적 권위를 해치고 우리를 안전하게 만들지 못하기 때문에 이미 사용을 금지했다"며 "하지만 메모 내용을 수행한 CIA 요원들에 대한 법적 처벌은 하지 않을 방침"이라고 밝혔다. "지금은 반성의 시간이지 징벌의 시간이 아니다"라는 설명이었다.
데니스 블레어 국가정보국장은 "그 메모들은 9·11테러 직후 CIA 요원들이 추가 테러를 막기 위해 골몰하던 때 작성된 것임을 감안해야 한다"며 "2009년 4월 밝은 햇빛 아래, 안전한 상황에서 읽는 메모들은 섬뜩하고 구역질나지만 정부는 그 메모들에 근거해 일했던 요원들을 보호해줄 것"이라고 밝혔다.
이에 대해 시민단체들은 정의의 구현을 포기한 처사라며 반발하고 있다.
과거청산 요구도 더욱 거세질 전망이다. 상원 법사위원회 패트릭 리히 위원장은 "오늘 공개된 메모들은 '부시 행정부에서 행해진 인권유린 실태 조사를 위한 독립적인 조사위원회를 구성하자'는 나의 제안에 더욱 힘을 실어준다"며 "솔직한 증언의 대가로 관련자들의 처벌을 면제해주면 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오바마 대통령은 "과거를 비난하는데 시간과 에너지를 써서 얻을게 없다"며 부시 행정부 프로그램에 대한 상세한 조사를 반대한다는 기존 태도를 견지했다.
워싱턴=이기홍특파원 sechep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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