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하라 도지사는 지난 16일 국제올림픽위원회(IOC) 평가위원회의 도쿄 현지조사 종료 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유럽의 식민 통치에 비해 일본의 통치가 '공평하고 부드러웠다'고 고(故)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들었다"는 망언으로 물의를 빚었다.
이에 대해 임 회장은 동아닷컴에 '이시하라 선생께 보내는 편지'를 기고하고 "필자는 한국 충남논산에서 태어나 1945년 8월15일 2차대전이 끝났을 때 초등학교 3학년"이라며 자신이 겪은 일제 식민 통치의 잔인성에 대해 말했다.
"매년 겨울이면 경찰들이 동리에 와서 우리 아버지를 비롯해서 온 동리 남자 어른들을 영하 10°∼20° 되는 수리조합 도랑물 얼음을 깨고 상의 옷을 벗겨 엎드리게 하고 얼음물을 등에 부으면서 '감추어 놓은 쌀을 모두 내 놓으라' 고 소리 치는 것을 직접 보았다. 온 동리사람들은 먹을 것이 없어서 무, 배추 말라붙은 잎까지 끓여 먹었다. 봄이 되면 풀이란 풀은 다 뜯어 먹었고 심지어는 소나무 껍질도 베껴 먹곤 하였다. 쌀을 빼앗아간 일본정부는 가끔 썩은 콩깻묵을 나누어 주었지만 3분의 2 이상이 시커멓게 썩은 것들이었다. 뿐만 아니라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학교에서는 물론 집에 돌아가서도 일본말만 쓰도록 강요하고 급우들끼리 감시하도록 했다. 선생님은 우리말을 쓴 횟수만큼 대나무 자로 손바닥을 때리곤 했다. 이렇듯 자기말까지 철저히 못하게 잔인한 식민통치가 어디 있겠는가."
임 회장은 1973년 9월 영국 런던에서 세계적 석학인 역사학자 아널드 토인비 교수를 만나 직접 경험한 일본식민지 통치에 대해 설명한 적이 있다고 했다. 그러자 토인비 교수는 일제의 잔인성에 깜짝 놀라면서 "일본의 식민지 통치가 너무 잘못된 것 같다"고 했다고 전했다.
그는 "토인비 교수도 자신의 경험을 말해 주었는데 '1929년 도쿄에서 부산-신의주를 기차로 지나왔는데 가는 기차역마다 군인들을 많이 보았다'며 '군국주의가 대단히 심한 것 같더라'고 했다"고 말했다.
임 회장은 1975년 이시하라 지사가 한국 정부의 초청으로 방한했을 때 그와 만나 이야기 한 적이 있다고 한다. 당시 이시하라 지사는 젊고 유명한 소설가 겸 정치인으로 이름을 알리고 있었다. 임 회장은 "당시 그는 대단한 지성인으로 느껴졌고 지성인으로서 한일 우호 교류를 위해 큰 역할을 해줄 것으로 보였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시하라 지사는 일흔을 넘긴 나이에도 '중국이 북한을 흡수해야 한다' '일본이 세계 2차대전을 일으켰기 때문에 아시아 국가들이 서구의 식민 지배에서 해방됐다'는 등 줄기차게 망언을 일삼았다.
임 회장은 "왜 그런 말을 할까 고민하다가 이시하라 신타로 같은 뛰어난 지식인도 '경험'이 없으면 '진실'을 말하기가 어렵다는 결론을 얻었다"며 "따라서 내 경험을 들려주기로 했다"고 공개서한을 쓴 취지를 밝혔다.
다음은 임 회장이 쓴 '이시하라 선생께 보내는 편지' 전문이다.
서양에 '돈으로 모든 것을 살 수 있지만 경험은 살 수 없다' 는 속담이 있다. 세월이 갈수록 '그 속담은 진리다'라는 생각에 실감을 하게 된다.
최근 일본의 지성적 정치지도자인 이시하라 신타로 도교 주지사가 '유럽선진국에 의한 식민통치에 비해서 일본이 한 것은(한국을 통치한 것) 오히려 부드러웠고 공평했다고 들었다'는 발언을 하여 한국 국민들의 분노를 일으키고 있다.
필자가 1975년에 이시하라 전 의원을 서울에서 직접 만났을 때는 대단한 지성인이라고 느꼈다. 그뿐 아니라 날이 갈수록 한·일간 우호 증진에 크게 기여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런데 지난 30여년을 지켜보니 한국 국민들이 잊을 만 하면 가끔 진실과 너무 동떨어진 발언을 해 분노를 자아내곤 하여 너무 안타깝게 생각한다.
논어(論語)에 '70세가 넘으면 하고 싶은대로 해도 법에 어긋나는 일은 하지 않게 된다(七十而 從心所欲 不踰¤)'는 말이 있다.
이제 이시하라 선생도 70세를 훨씬 넘어선 상태 아닌가. 그런데 왜 그런 말들을 하곤 할까 필자는 깊이깊이 생각해 보았다. 이에 대한 필자의 결론은 "이시하라 신타로처럼 뛰어난 지식인도 '경험'이 없으면 '진실'을 말하기가 저렇게 어려운 것이로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따라서 일본이 한국을 얼마나 잔인하게 통치했는지 필자가 직접 경험한 것을 소개하고자 한다. 필자는 한국 충남논산에서 태어나 1945년 8월15일 2차대전이 끝났을 때 초등학교 3학년이었다.
매년 겨울이면 경찰들이 동리에 와서 우리 아버지를 비롯해 온 동리 남자 어른들을 영하 10°∼20° 되는 수리조합 도랑물 얼음을 깨고 상의 옷을 벗겨 엎드리게 하고 얼음물을 등에 부으면서 '감추어 놓은 쌀을 모두 내 놓으라' 고 소리 치는 것을 직접 보았다.
나는 어린 마음에 너무 놀랐다. 일본 경찰은 이미 모든 동리 사람들이 쌀농사 지은 것을 전부 빼앗아간 상태였다. 온 동리사람들은 먹을 것이 없어서 무, 배추 말라붙은 잎까지 끓여 먹었다. 봄이 되면 풀이란 풀은 다 뜯어 먹었고 심지어는 소나무 껍질도 베껴 먹곤 하였다. 쌀을 빼앗아간 일본정부는 가끔 썩은 콩깻묵을 나누어 주었지만 2/3 이상이 시커멓게 썩은 것들이었다.
어느 봄날 학교를 다녀온 아들인 나에게 어머니께서 시커먼 죽을 차려 주셨다. 필자는 성격이 순종형이라 부모님 말씀은 절대시하는 성격이었다. 그러나 너무 시커먼 죽이라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어머니께서 주셨으니까 한 수저를 입에 떠 넣었다. 그런데 너무 써서 도저히 먹을 수가 없어 할 수 없이 다시 뱉었다. 그리고 "어머니 너무 써서 먹을 수 없어요!" 그 순간 베를 짜던 어머니께서 고개를 반대로 돌리시더니 고개를 떨구셨다.
나는 밖으로 나갔다. 세월이 가면서 '그때 왜 우리 어머니께서 고개를 돌리시고 고개를 떨구셨을까' 깊이 생각해보았다. 아들에게 줄게 없어서 보리겨 죽을 주었는데 써서 못 먹겠다고 하니 기가 막혀서 우신 것 같다. 그때 우리 어머니 마음이 얼마나 아프셨을까. 내가 꾹 참고 아무 말 없이 맛있게 먹었으면 좋았을 터인데 하며 지금도 후회하며 눈물짓곤 한다.
그뿐 아니다,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일본어를 아직 배우지도 않은 상태에서 학교에서는 물론 집에 돌아가서도 일본말만 쓰도록 강요하였다.
학교에서는 매주 월요일이면 학생들에게 종이로 만든 표 5장씩을 나누어 주고 학교에서나 집에 돌아가서 한국말을 하면 친구들끼리 표를 뺏게 했다. 다음 월요일에 표를 조사하여 표가 부족한 수만큼 선생님이 대나무 자로 손바닥을 때리곤 하였다. 그러니까 학교뿐 아니라 집에서도 한국말은 절대 못쓰게 하였다.
이렇듯 자기말까지 철저히 못하게 한 잔인한 식민통치가 어디 있겠는가.
그뿐 아니다. 일제 말 한국 농촌에서는 집집마다 쇠로 만든 숟가락 젓가락 문고리를 하나도 남김없이 빼앗겼다. 쇠는 모두 무기를 만들어야 한다고 징발해갔기 때문이다.
필자가 겪은 경험은 약과에 불과하다. 명성황후 시해를 비롯해 비참하게 학살당한 이야기를 들으면 한도 끝도 없다. 한마디로 일본 통치는 너무 잔인했다.
한국인에게는 가장 치욕적인 욕이 '성을 바꿀 놈'이다. 성을 바꾼다는 것은 부모를 바꾼다는 뜻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본은 한국인 전체의 성을 일본식으로 바꾸어 놓았다. 얼마나 치욕적이고 분노를 느꼈을까 상상할 수 없다.
필자는 1973년 9월 영국 런던에서 세계적인 석학 역사학자 아널드 토인비 교수를 만났다.
필자가 직접 경험한 일본 식민지 통치를 설명했더니 그는 깜짝 놀라면서 "일본의 식민 통치가 너무 잘못된 것 같다"고 말했다. 그리고는 "1929년 도쿄에서 부산-신의주를 기차로 지나왔는데 가는 기차역마다 군인들을 많이 보았다"며 "군국주의가 대단히 심한 것 같더라"고 그가 받은 느낌을 말했따.
요컨대 1905년 미·일간 맺은 가쓰라-태프트 비밀협정으로 일본이 한국을 강점한 이래 그 잔학상은 일일이 열거 할 수 없다. 식민 통치방법만이 문제가 아니다. 근본적으로 일본의 식민통치가 없었으면 한반도가 분단 될 리가 없었고 분단이 없었으면 6.25전쟁이 없었을 것이며 남북한간 전쟁이 없었으면 오늘날 북핵문제도 없었을 것이다.
필자는 이시하라 선생에게 이 시점에서 한·일간의 영원한 후손들의 미래를 생각하면서 평화스러운 이웃나라를 만드는데 더 관심을 가져 보자고 제의하고 싶다.
그리하여 양국의 후손들로부터 먼 훗날 "이시하라 선생의 노력으로 한·일 양국이 한때 원수였던 독일과 프랑스가 화합해서 유럽연합(EU)을 만든 것처럼 아시아에서 가장 가까운 이웃나라가 되었다"고 평가받을 날이 오기를 기대하고 싶다.
최현정 동아닷컴 기자 phoebe@donga.com